“여러분!” 그가 말했다. “이반 일리치가 죽었다는군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주인공인 검사 이반 일리치의 부고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에는 잠깐의 의도된 수사들만 동원될 뿐, 대부분 자신의 삶에 끼칠 영향에만 신경 쓴다. 그것도 노골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반 일리치는 그곳에 모인 신사들의 동료로서 모두 그를 사랑했다. 그가 병석에 누운 지는 벌써 몇 주일째였고 불치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자리는 아직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만약 사망할 경우 그 자리에는 알렉세예프가 임명될 것이고, 그러면 알렉세예프의 자리엔 빈니코프나 시타벨이 임명될 수 있다고들 생각했다. 그래서 집무실에 모인 이 신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판사들 당사자나 지인들의 인사이동이나 승진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였다.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민음사 김연경 옮김) p. 7 ~ 8
사회에서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가족이 아닌 바에야 죽음은 잠깐의 애도 후 복잡하고 잡다한 관계 재설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죽음이 그럴진대 직장에서의 은퇴나 퇴직은 얼마나 더 냉소적이고 허망할까. 누군가는 존재했던 곳에서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바라고, 그 부재가 주는 악영향이 가급적 오래 남기를 은연중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소박한 질투에 친절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조직들은 누군가의 부재를 빠르게 대체하고 변화를 기회삼아 더 신속하게 움직이기도 한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La Nausée)]에는 주인공 로캉탱이 도서관에서 일하는 노쇠한 역사학자를 보며, “그는 단지 습관 속에서 존재할 뿐”이라고 인식한다. 사르트르가 노인을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 속의 존재로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노인을 향한 타인의 시선, 즉 의미 없고 서서히 인생에서 퇴장할 준비를 해야 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지을 때 인간이 어떻게 주체성으로부터 멀어지는지를 암시한다.
노인 복지의 기준이 되는 나이를 상향하자는 여론이 높다. 65세는 은퇴 및 휴식으로 상징되는 노인으로 사회가 수용하기 너무 젊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면에는 고령화로 인해 국가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의 상승 부담이 있음을 누구나 안다. 한편으로는 OECD 국가 중 가장 심각한 노인 빈곤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더 이상 노인이 아닌 그들에게 기존의 경제적 혜택을 철회할 경우 발생할 가혹한 현실을 얘기한다. 물론 한국 노인이 정말 가난한지 의구심을 표하는 시선도 일부 존재한다. 이들 다수의 의견과 시선들 사이에서 무난하게 동의를 얻는 이야기는 고령자들에게 근로소득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경험과 누적된 숙련성의 가치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사회 구성원 모두는 그들의 노련한 경험에 기꺼이 값어치를 매기며 고용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안타깝지만 이 질문에 흔쾌히 동의하는 사람을 만나본 기억이 없다.
은퇴한 자를 사회에서 역할이 마무리된 배역으로, 반복되는 기계적 삶으로 진입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기준이 상향된 몇 년간 그 시선이 유예된다 해도 이런 가치관이 번복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도 나는 거대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수많은 시도를 목격한다. 이를테면 경로당이 아닌 도서관에서, 무료급식 정보가 아닌 구인구직난을 들여다보는 눈빛에서 그들의 실존적 자기 쇄신을 발견한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연출한 영화 [비우티풀(Biutiful)]에서 주인공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 분)은 불법으로 가득한 인생을 산다. 바르셀로나 뒷골목에서 어린 아들, 딸과 사는 욱스발은 암으로 인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다. 회색빛 가득한 인생에서 그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지 않지만,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게 될 가까운 미래에 대한 번민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어린 딸에게 하는 대사는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는 이가 가능한 한 오랫동안 기억하기 바라는 희망을 담아낸다.
“아빠를 기억해. 잊으면 안 돼. 안나. 아빠를 잊으면 안 돼.”
나는 도서관에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거나, 철학서적 등을 탐닉하는 늙은 은퇴자들의 굽은 등을 보며 욱스발의 슬픈 희망도, 이반 일리치의 회한도 발견한다. 하지만 그들이 미래에 남기게 될 그들 자신만의 존재가치는 결코 슬프거나 억울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예외 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