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밤 산책 02화

얼굴들

by 현율



“누가 빌런이야?“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편의점 작은 테이블에 모여 가을바람에 요란한 나뭇잎들처럼 부산스러웠다. 아이들의 초롱거리는 눈빛들이 한 친구의 휴대폰 화면에 모아져 있었다. 한 아이가 확신에 찬 소리를 지른다. “얘네. 얘가 빌런이야. 관상은 과학이라니까?” 그때 관상은 과학이라는 표현이 장마철 우산처럼 널리 쓰이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관상. 겉으로 드러난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기질에서 운명까지 예측하려 하는 아주 오래된 학문 또는 관습. 그것이 곧 과학이라고 한다. 전혀 생경하지 않은 이 표현에 문득 기억 속 흉터처럼 남아있는 세 개의 얼굴을 떠올렸다.


첫 번째 얼굴 – 케테 콜비츠, 고통과 좌절의 얼굴들

케테 콜비츠의 판화전을 찾았던 경험은 너무 아득해서 지금은 그 얼굴들이 주는 이미지들만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 활동과 작품에 단호한 목적을 부여했다. 그것은 누구도 보호하거나 구원해주지 않는 밑바닥 계층의 삶들을 위한 것이었다. 1867년에 독일에서 태어나 1945년에 사망했으니, 그녀의 삶은 산업화 과정에 희생되는 빈민층과 1, 2차 세계대전, 나치의 역사를 관통한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되는 비극이지만, 전쟁과 기아의 환경 속에서 그녀는 노동자와 농민의 처절한 굴종과 가난을 목도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 고통과 좌절을 고스란히 그녀의 작품에 녹여냈다. 그녀의 연작 작품들-직조공들, 농민전쟁 등을 통해 내가 발견했던 얼굴들은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세계사 속 그 어떤 텍스트나 사진들도 콜비츠 판화 속 인물들이 뿜어내는 감정을 대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작품들을 만났던 것은 내가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이었고, 그 경험은 내가 세상의 지독한 현실을 냉정한 리얼리즘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계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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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가 설마 희망없는 고통과 좌절의 얼굴들만 그렸을까. 두 번의 세계대전 중 아들과 손자를 잃은 그녀는 전쟁이라는 잔혹한 폭력에 대항하는 그림으로 그 유명한 ‘씨앗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를 남겼다. 그녀 삶의 끝자락에 완성된 이 석판화 속 어머니 얼굴에는 비탄과 비장함, 그리고 무쇠 같은 저항의 이미지가 함께 담겨있다. 아이들을 감싸 안은 굵은 팔뚝 위의 치켜뜬 눈매는 포악한 세력에 굴복할 기미가 없는 여성의 얼굴을 상징한다.


IMG_9318.JPG Seed for Sowing Should not be Milled, 1941-42, (chalk lithograph)


두 번째 얼굴 – 토리노의 말, 지독한 고독의 얼굴

벨라 타르의 영화 ‘토리노의 말’을 언제 보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헝가리 출신 거장이 만든 흑백영화 속 얼굴에서 나는 이처럼 지독한 고독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영화는 말 한 마리가 전 재산인 것으로 보이는 아버지와 딸의 삶이 점차 종말과 어둠으로 향하는 닷새간의 시간을 그린다. 대사는 극히 절제되어 있으며,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황량한 바람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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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부녀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과 깊어가는 결핍이 이어진다.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는 딸의 표정은 시종일관 관객의 시선을 잡아둔다. 감독은 이 절제된 영상들 안에 말라버린 우물, 불붙지 않는 등잔, 유일한 식량인 감자, 나무 한 그루 서있는 황량한 언덕 등 다양한 장치들을 배치해두었다. 하지만 어떤 감정도 수면 밑에서 부양하지 않는, 그녀의 창백하고 건조한 표정은 영화 속 가장 현실적인 고독이었다. 영화를 접한 이후 때로 예기치 않게 불쑥 찾아오는 적막을 만날 때면 한동안 나는 영화 속 딸의 표정을 떠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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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얼굴 – 사르트르의 얼굴

아침에 차가운 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거울을 올려다본다. 매번 낯선 남자가 그곳에 서 있다. 전날의 고단했던 갈등에 대한 기억들이 흘러내리고, 정체모를 미지의 시간들에 대한 호기심이 묻어있다. 도대체 거울 속의 얼굴은 누구인가. 내가 나를 정의한다면 어떤 수사를 도용해야 하는가.


사실 오래전 사르트르에 대해 일기 시작한 궁금증은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의 외모 때문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사르트르는 지독한 사시와 작은 키를 가졌었다. 하지만 그는 당대 뭇사람들의 선망이었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파트너였으며, 당시 프랑스를 상징하는 지식인이었다. 사람은 살면서 나는 무엇인가 또는 누구인가에 대한 폭풍 같은 질문에 휘말리는 시기가 있다. 내가 가진 본성은 어떤 것이고, 내 인생은 어떤 운명의 길에 서 있는지 등에 대한 근심들이다. 전혀 실용적이지 않지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런 마음 속 질문에 시달리곤 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에 대해 비교적 온정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신이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이며, 의미 있는 삶에 대한 답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이 곧 나인 셈이다.


"실존주의자들에게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더 이상의 반박은 없다. 우리는 온전히 실현한 기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의 사랑이란 없으며, 오로지 사랑하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천재란 없고, 천재적인 행동만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한 번에 한 붓질씩 자기 자화상을 그린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곧 그 자화상이며 “오로지 그 자화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말 것. 스스로를 그려 나가기 시작할 것."

-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p.445


나는 첫인상을 믿지 않는다. 사람을 처음 보고 그의 성격이나 취향을 추측하는 것이 내 연륜에 턱없이 무모한 일이거니와, 한때 첫인상에 의지해서 누군가의 성향을 예감했던 시도가 정반대의 결과에 무참히 무너진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몇 번의 어쭙잖은 실패를 딛고 내린 결론은 관계를 이어가기 전에는 누군가에 대해 ‘알 수 없다’였다. 이 짧은 결론은 관계에 있어 예기치 않은 지름길은 없어도, 마음속에 돌발적인 비극은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이득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언급한 타인의 시선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우리 각자는 ‘자유를 선고’받은 독립된 객체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타인의 시선에 묶여 그 시선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 실존주의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삶에는 정해진 시나리오가 없어서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일 뿐이며, 그러던 어느 순간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이 곧 나 자신인 것이다.


내가 살면서 겪은 심각한 고통이나 좌절의 순간들은 케테 콜비츠가 찾아낸 그 얼굴들이었을까. 사방이 조용한 순간에 영화 ‘토리노의 말’이 제시한 고독한 얼굴은 내 경험 속에 존재했던 것일까. 아직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답을 찾지 못해 ‘관상’이란 자극적 단어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행인 것은 여전히 나는 ‘운명’과 연결된 관습들에게 그리 호의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편의점 테이블에 왁자하게 모여 있는 아이들에게 ‘관상이 과학일 리가 있나?’ 라고 대답해 주었다. 마음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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