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을 사랑하는 청소년 (1)
나는 오랫동안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공교육의 틀 안에서 살아왔다. 학교에서 실패하면 안 된다. 수행평가, 지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주어진 정답을 최대한 똑같이 외우는 게 중요했다. 수행평가는 새로 도전하고 싶은 주제보다는 진로에 맞추는 게 안전했다. 자칫 실패하면 입시에 불이익이 주어진다. 학생들은 마치 생활기록부의 노예처럼 선생님의 수동적으로 따랐다. 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완벽하게 진로를 설계해서 그에 따른 활동을 해 나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곤 했다. 가끔 학교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일탈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들은 곧 관심 밖으로 밀려 난다. 잘못된 선택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늘 정답만을 좇으며 불안과 압박 속에 지냈다. 이런 교육은, 학교는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를 좋아하는 학생은 흔치 않다. 나는 그 흔치 않은 학생 중 하나였다. 배우는 게 좋았고, 학교도 좋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주위 학생들이 학교를 싫어하게 된 순간을 느꼈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학생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정한 배움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어느날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한 포스터의 문구 한 줄. ‘네가 생각하는 학교를 만들어 봐’ 해야 하는 거 말고 학고 싶은 걸 하는 곳, 경쟁 없이 함께 배울 수 있는 그런 학교를 만들자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그동안 학교 시스템에 질려버린 나를 부르는 듯 했다. 학생이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학교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을 시작하던 봄, 나는 학생이 만드는 학교를 꿈꾸며 (가칭)인천청소년자치학교추진단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처음부터 실패할 줄 알았을까. 그것도 완벽한 실패를.
추진단 활동은 5월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7월까지 한 번도 대면 모임을 하지 못하다가 드디어 7월 4일, 첫 대면 모임을 갖게 되었다. 우리 조는 첫 모임에서 ‘삼삼오오 워크숍’을 진행하기로 했다. 삼삼오오 워크숍은 함께 식사하며 친해지는 시간이다. 운영팀에서 나눠준 식사 기프티콘으로 식당을 잡기로 했다. 떡볶이부터 피자, 치킨, 아이스크림까지 27가지 다양한 음식 중에 고를 수 있었다.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이끔이 역할을 맡아 첫 모임을 준비했다. 팀원들과 카톡에서 메뉴와 날짜를 의논했다.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친구들이었지만 메뉴를 정할 때만큼은 일심동체가 되었다. 긴 고심 끝에 우리는 ‘치킨’을 골랐다. 12시에 회관 근처 치킨집에 모여 식사하고, 2시까지 여유롭게 회관에 가기로 계획했다. 참석 인원을 확인하고, 운영지원팀에게 치킨집 기프티콘을 받았다. 치킨집 장소도 공유하며 나름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첫 모임인 만큼 실수하지 않고 잘 해내길 바랐다.
드디어 활동 당일이 되었다. 나는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치킨집까지 걸어가고 있는데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거리는 꽤 한산했다. 기분 좋게 치킨집 앞에 도착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치킨집의 불이 꺼져있는 것이었다. 문도 잠겨있었다. ‘아차!’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 다들 모이고 있는 상황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왜 영업시간 확인도 안 하고 갔을까. 단체로 갈 때는 예약이 필수인데 식당 예약 경험이 없던 나는 너무 당당하게 아무 준비 없이 간 것이다. 시간 확인도, 예약도 안 했으니 문이 닫혀 있는 게 당연했다.
그때 팀원들이 거의 다 왔다는 문자를 보냈다. 문이 잠겼으니 다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화도 안 받는 치킨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으로 슬슬 모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저것 방법을 찾아보았다.
운영지원팀에서는 전화로 “우선 회관으로 와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하시고, 옆에 도착한 친구는 “옆 가게에서 이 치킨집은 12시부터 문을 연다고 말씀하시니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리자”라고 한다. 길잡이 선생님께서는 카톡으로 “밖이 더운데 근처에 내가 일하는 곳이 있으니 우선 거기서 기다리자”라고 말씀하신다. 더 혼란스러워졌다. 우리는 회관과 치킨집, 선생님의 직장 사이를 방황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톡방에서는 길을 잃었다는 친구부터, 10분 째 지하철역 출구라고 하는 친구,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냐는 친구, 주차할 곳이 없다는 선생님의 목소리까지, 정신이 없었다. 이도저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우리는 뜨거운 길바닥 위에서 30분을 보냈다.
그 순간, 사장님이 도착하셨다. 셔터 문이 활짝 열리고, 모든 게 한순간에 해결되었다. 드디어 우리는 치킨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무사히 들어갔지만 팀원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속상했다. 나의 준비 부족으로 인해서 첫날부터 정신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먹으면서도 마냥 웃을 수 없었다. 그때 길잡이 선생님께서 내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셨다. “실패해도 괜찮아!” 누구나 처음에는 실수한다고, 오늘의 실패를 통해 배우고 다음번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잘못했다고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고생했다고 나를 격려해주셨다.
그 말 한마디가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 여기는 정말 안전한 곳이구나, 실패해도 괜찮구나!’하고 생각했다. 맛있게 치킨을 먹고 회관으로 돌아가 나머지 워크숍 활동들은 무사히 마쳤다. 파란만장한 첫 실패 경험 덕분에 이후 은하수학교에서 활동을 준비하게 되면 모임 전에 미리 준비해 놓는 습관이 생겼다.
이날의 실패에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바로 ‘안전한 실패’였다는 것이다. 한번 실패하면 끝나버리는 실패가 아니라, 일어서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다시 회복할 기회가 있는 실패였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 한 마디가 다음에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주었다. 안전하게 경험한 실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약이 된다. 실패 좀 하면 어떤가. 실패하고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처음 마주한 청소년 자치학교 추진단은 마치 놀이터 같았다. 실패할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 학생들에게 놀이터 같은 환경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혁신은 놀이터 같은 안전한 환경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