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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May 10. 2021

맑은 날에 피츠로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외로운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6 Fitz roy

새벽 4시.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자마자 껐다. 도미토리였기에 다른 이들이 깨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아주 조용히 그림자처럼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전날 밤 미리 짐을 꾸려놓았고 카메라 가방과 준비해둔 옷만 들고 나와 화장실에서 대충 준비를 하고 서둘러 호스텔에서 나왔다. 피츠로이로 트레킹을 가기 위해서였다. 운이 좋으면 일출을 볼 수도,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아 불타는 피츠로이를(일명 불타는 고구마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기예보에서는 날씨가 맑을 것이라고 했지만 믿을 수는 없었다. 비만 오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새벽 4시 반에 이렇게 혼자 작은 렌튼 불빛에 의지해 길을 걷다니, 그것도 산을 향해서...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거리는 아직 어두웠고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걷거나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내겐 시간도 많지 않았다. 피츠로이까지 왕복 8시간, 내가 엘 칼라파테로 가는 벤을 예약한 시간은 12시 반이다. 그러니까 딱 8시간 안에 피츠로이에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고 두려움에 쫓겨 나는 거의 뛰다시피 걸으며 피츠로이 등산로 입구로 들어섰다. 


날은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으나,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일출을 보러 이 시간에 많이들 올라간다고 들었는데 호스텔에서 나와서 등산로 초입에 이르기까지 15분은 넘게 걸었는데 아직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하긴 사람을 본다 해도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사위가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산 중턱쯤에 이르렀을 때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산고의 고통을 겪는 것처럼 하늘과 산들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아직 피츠로이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데 벌써 해가 떠오르면 붉은 고구마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더욱 서둘렀다. 좀 더 일찍 나왔어야 했나라는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발바닥은 아직 부어있었고 물집 잡힌 자리가 쓰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내쳐 걸었다. 



선라이즈가 선셋만큼이나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동쪽을 등지고 걸어야 해서 해가 떠오르는 순간순간을 다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피츠로이까지 10km 중 1km 지점을 넘어서니 피츠로이 봉우리가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봉우리를 본 첫 순간도 감격이었다. 일출과 피츠로이 봉우리를 보느라 어느새 두려움도 무서움도 사라졌다. 부지런히 걸었지만 다시 피츠로이 봉우리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해는 완전히 떴다. 3km 지점을 지나니 전망대가 나왔다. 아... 30분만 더 서둘러 나왔더라면 이 전망대에서 일명 불타는 고구마라는 장관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그래도 운이 좋은 것은 하늘이 맑다는 것이었다. 봉우리 주위에 구름이 조금 있어서 피츠로이 봉우리를 가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잘 본 것이다. 


전망대에는 어디서 왔는지 사람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분명히 올라올 땐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일찍 올라왔나 보다. 전망대에서 머물다가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여기까지만 보고 호스텔로 돌아가 아침 먹고 좀 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의 목표는 호수까지 가는 것이었다. 



전망대에서 본 피츠로이를 마음에 새기며 나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서 라구나 라스 뜨레스(Lag. de los tres)를 향해 또다시 열심히 걸었다. 6km 지점까지는 언덕과 산길의 반복이었다가 7km 지점을 지나면 들판이 나오고 강을 건너고 또다시 숲길이 나온다. 바삐 걸어가면서도 주위의 풍경에 감탄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산도 강도 호수도 너무도 아름답고 훌륭했다. 자연 그대로의 날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8km를 지나니 캠핑장이 나왔다. Poincent라는 곳이었는데, 그곳도 전망대가 있어서 일출 보기에 좋은 장소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많고 텐트도 많았다. 나도 야영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에서 깨어나 여유롭게 움직이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둘러보고 다시 움직였다. 


9km 지점이 지나자마자 마의 구간이 나왔다. 온통 돌 뿐인 돌산을 기다시피 올라가야 했다. 한국에도 험한 산에는 깔딱 고개라는 곳이 있는데 (꼴까닥 숨이 넘어갈 만큼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마의 구간을 뜻한다.), 그러나 이곳에 비하면 깔딱 고개는 양반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기어 올라갔다. 어느새 풍경도 황량하게 바뀌었다. 피츠로이 봉우리는 사라져 안 보였고, 앞에 보이는 산은 온통 흙무더기로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았다. 주위가 온통 돌무더기뿐이었다. 앞서 거나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9km 이전까지는 거의 쉴 필요가 없을 만큼 가벼운 길이었는데 마의 구간에서는 도저히 쉬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쉬지 않고 걸어오면서 벌어놓은 시간들을 다 까먹으며 쉬다 걷다, 기다를 반복했다. 



이 지겨운 돌무더기가 언제쯤 없어질까 하는 생각만 하며 고개를 쳐들었는데 앞에 피츠로이 봉우리가 다시 나타났다. 아주 가까이에서. 그러나 아직 두 개의 돌무더기 언덕을 넘어야 하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그래도 피츠로이가 보이니까 그것만 바라보며 걸으니 그나마 덜 힘들었다. 마지막 힘까지 다해서 마지막 돌무더기 언덕을 넘어섰을 때 비로소 피츠로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푸른색 호수를 안고 있는 피츠로이는 말 그대로 늠름한 모습이었다. 



어느새 봉우리를 감쌌던 구름은 다 걷히고 피츠로이는 그 자체로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맑은 날에 피츠로이를 보다니 너무 감격스러웠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리는 없는데...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맑고 쾌청한 날씨가 어제, 오늘 이어지다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한참을 넋을 놓고 피츠로이와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는 빙하가 녹은 물이어서 흔히 볼 수 없는 비취색이었다. 자연 그대로, 정말 순수한 자연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이 곳의 자연이 더 위대해 보이는 것은 그 어떤 문명의 개입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관광지에서 흔하디 흔한 케이블카도 없고 시멘트로 곱게 계단을 만들어 놓지도 않았고, 호수 주변을 펜스로 둘러쳐서 안전하다는 표시를 해 놓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나무로 엉성하게 만들어 놓은 나무다리들을 몇 개나 건너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안전하게 정상까지 올라와서 벅찬 감동으로 봉우리와 호수를 감상한다. 물론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안전사고가 일어나는지는 모르지만, 안전을 핑계로 자연을 훼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어느 지점에서부터 인지 모르겠지만 대가족으로 구성된 팀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게 되었다. 바위에 앉아 잠시 쉬면서 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에콰도르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부모님과 여동생들, 자기 가족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에콰도르에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아르헨티나에 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3대가 함께 피츠로이 트레킹을 한다니 대단해 보였다. 그의 아들은 예닐곱 살 정도로 보였는데 보채지도 힘들어하지도 않고 막대기 하나 짚고 부지런히 걷고 뛰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냥 걷는 것도 힘들어 보였는데, 마의 구간에서는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차근차근 쉬다 기다를 반복하며 돌산을 올라갔다. 결국은 그들의 일행보다 한참을 뒤쳐졌는데, 그 가족은 엄마에게 빨라오라고 재촉하지도 옆에 가서 부축을 해주지도 않았지만 엄마가 호수가 보이는 정상까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가 호수를 보게 되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서로 격려하며 한참을 안아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수가로 가기 위해 다시 돌무더기를 내려갔다. 에콰도르 가족도 그들의 엄마도 호수가를 향해 내려갔다. 호수가로 내려가서 빙하를 보러 봉우리 쪽으로 더 가까이 갈 거라고 했다. 아들이 내게 말했다. 


"저기까지 가야 진짜로 피츠로이를 다 볼 수 있는 거야. 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래?" 


나는 호수 가까이는 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돌무더기를 오르거나 내려가기 싫었다. 호수와 피츠로이를 마주 볼 수 있는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젠 시간도 없었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나는 곧 다시 내려가야 했다.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고요하고 굳건하게 서있는 피츠로이를, 아니 거대하게 우뚝 서있는 바위 덩어리를 한참을 마주 보았다. 사실 지금은 그때 호수가로 내려가 보지 않았던 것이 조금 후회되기도 하지만 그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려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10시 전에는 내려가야 하는데 거의 10시가 다 되었다. 마의 구간만 무사히 빠르게 내려간다면 그 이후엔 내려가는데 두 시간도 채 안 걸릴 것이다. 왠지 모르게 밀려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돌무더기 언덕을 내려갔다. 



다시 되돌아 가는 길에도 다시 본 자연 풍광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설레고 멋진 모습이었다. 올라갈 때 여유가 없어서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려오는 길에 데이비슨을 만났다. 그는 아침 8시쯤에 출발했다고 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라며, 서로의 행운을 빌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와 작별하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뒤돌아 보았더니 피츠로이 봉우리 쪽 하늘에 구름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 그 선한 미소를 가진 남자가 맑은 하늘에 완벽한 모습의 피츠로이를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새벽에 내가 올라왔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피츠로이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모두 발걸음이 가볍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아마도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절로 좋아졌으리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맑은 날에 피츠로이를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내려오면서 뒤돌아본 피츠로이 주변의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다만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풍경과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해서 시간이 조금씩 지체되고 있었다. 


마을로 돌아오니 거의 12시 반이었다. 왜 좀 더 늦은 시간으로 예약하지 않았는지 나 자신을 구박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 호스텔 주인이 벤 시간을 바꾸기 위해 전화를 해 줄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왜 거절했는지 모르겠다. 후회가 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의 1시가 다 되어서 호스텔에 도착했는데 다행히도 아직 벤이 오지 않았다고 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호스텔이어서 제일 처음으로 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마도 맨 마지막에 나를 데리러 오려나보다 하며 한숨 돌리고, 호스텔 주인과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기다려도 벤이 오지 않자 주인은 버스 회사로 전화를 걸어서 언제쯤 오는지 물어보기까지 하더니 내게 버스가 곧 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켜준다. 정말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그의 친절함에 호스텔 어플 후기에 좋은 평점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벤이 왔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엘 찰텐 여행이었다. 이제 엘 칼라파테로 향해 떠난다. 내 인생에서 또다시 이곳을 밟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아마도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스텔 주인과 '다음에 또 봐요!'라는 인사를 했다. 엘 찰텐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이곳에 온 게 두 번째, 세 번째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다시 밟고 싶은 땅, 엘 찰텐. 

Hasta lu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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