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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빵장수 Apr 23. 2019

여섯 살의 트루럽

트루럽이란 말에 요즘 꽂혔다. 겉모습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못난 모습, 슬픈 모습까지 사랑해준다는 뜻이다. 나에게도 트루럽은 있었다. 까마득한 여섯 살의 나에게 트루럽을 선사한 아이가 있었다.


6살 예원유치원 꽃반 소속인 나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당시 이 유치원에서는 졸업 앨범에 졸업 비디오까지 제작해주었기에 유치원에서 함께 뛰고 놀던 친구의 모습을 다양하게 기억할 수 있다. 꽃장식으로 감싸진 훌라후프를 3개씩 연결해 사진을 찍고, 요구르트병을 깨끗하게 씻어 장승을 만드는 미션 중에도 찍힌 사진이 있다. 그 외에도 야외 놀이터에서 나무에 드라이버로 못을 박고 있는 사진(?), 수영장과 풀볼장에서 노는 모습, 투호 던지는데 하나도 안 들어가고 모두 바닥에 던진 사진 등이 있다. 나름 액티비티가 엄청 알찼던 곳이었다. 그때마다 내 옆에는 유독 몇 명의 얼굴이 자주 겹치며 출연했다. 2명의 여자아이와 2명의 남자아이가 단짝으로 추정된다. 슬프게도 그중에 내 남자 친구가 누군지 헷갈린다. 분명 운동회고, 체험학습이고 늘 나는 무심코 '걔랑 해야지'란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을 했던 것만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엄마와 함께하는 장승 체험도 나와 우리 엄마, 걔랑 그 아이의 어머니와 함께 했다. 분명 나와 자주 사진에 함께 나온 남자아이 중 한 명일 텐데, 단짝이자 남자 친구였는데 누군지 도통 모르겠다. 겨우 20년 만에 남자 친구를 잃어버렸다.


당시 예원유치원에서는 점심시간이 찾아오면 일렬로 줄을 서서 식판에 급식을 받았다. 한걸음 한걸음 밥부터 국, 반찬, 디저트까지 받는다. 그 후에 넓은 방 안에 놓여있는 동그란 식탁이나 네모난 식탁들 중 원하는 곳에 앉아서 삼삼오오 식사를 하는 형식이다. 내 기억으로는 나는 원형 식탁에 앉는 것을 선호했고, 내 오른쪽이나 왼쪽 옆에는 늘 같은 남자아이가 앉았다. 다른 애들은 우리를 가리키면서 '첫사랑! 첫사랑!'이라고 조막만 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놀려먹기 딱 좋았다. 그 정도로 붙어 다녔으니까. 원형 식탁에 나와 내 남자 친구가 앉아있으면, 꼭 그 맞은편에 앉은 애들이 놀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보기 싫으면 다른 데 가서 좀 앉지 싶은데 당시 나는 쫓아내기에는 여렸다. 암튼 나는 그때 '첫사랑'이란 게 뭔지 잘 몰랐다.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쁜 것 같기도 했다. 짓궂은 말썽쟁이 포지션을 맡고 있는 친구들이 굳이 다가와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좋은 말인데 그때는 나쁜 뜻이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며칠, 몇 달간 지속되는 '첫사랑 지적질'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는 서로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어느 날의 점심시간. 한걸음 한걸음 또 밥과 반찬을 배식받던 중이었다. 그때 급 소변이 마려웠다. 손에 든 식판은 점점 채워지고 무거워지는데, 무엇보다 내 방광이 제일 무거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식판을 배식해주시던 어머니에게 맡길 수도 없고, 뒤돌아서 가기에는 이미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갑자기 화장실 간다고 하는 것도 오줌 마린 것을 동네방네 알리는 일이니 최악이다. 지금 나이의 3분의 1도 살지 않았던 겨우 6살이었지만 지금처럼 고집도 자존심도 나름 센 인간이었다. 결국 식판도 배식 순서도 놓치지 않고 싶었던 나는 서서 시원하게 일을 봤다(?). 서서히 바지가 뜨뜻해지고 불쾌했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려고 했는데 내가 느끼기에도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걸음을 떼기에는 또 워낙 흥건해서 티가 났던 것 같다. 배식을 지켜보던 꽃반 선생님, 참으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생님이셨는데 왠지 눈치를 챘던 것도 같다. 그녀가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암튼 새 바지로 갈아입지도 못한 채로 밥을 먹었다. 축축하고 지린내가 날 법도 한데 내 남자 친구는 내 옆에서 꿋꿋하게 밥을 먹었다. 눈치를 못 챈 건지, 비위가 좋은 건지, 내가 좋은 건지 그 후에도 나한테서 도망치지 않았다.


한 번은 눈이 펑펑 온 다음날, 유치원 셔틀버스를 타러 가는데 빙판 언덕길에서 쭉 미끄러진 적이 있다. 발로 짓밟혀 구정물이 된 눈밭에 미끄러져 내 노란색 바지는 누가 봐도 큰일을 본 아이처럼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바지 뒷면을 보는데 유치원에 가지 말까 고민했다. 이대로는 유치원 등원 중에 똥 싼 애로 낙인찍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집으로 가기엔 엄마를 설득할만한 이유가 너무 소박했다. 엄마는 되지도 않는 이유로는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갈색으로 범벅이 된 바지를 입고 간 날, 그때도 나의 트루럽은 내 곁에서 밥을 먹었다. 내가 오줌을 싸던, 똥 싼 것으로 추정되던 내 옆에서 묵묵히 나와 이야기하고 밥을 먹었거나 먹어줬다. 극강의 못난 모습일 텐데 말이다. 지금에 와서 당시의 로맨스를 비슷하게라도 재현하기는 꽤 많이 어려울 듯싶다.

어느 날은 그 아이의 누나가 휴지가 없었던가 무슨 이유 때문에 화장실에서 몇시간이고 계속 앉아있었다고, 웃기지 않냐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나는 그때 웃긴 건 둘째치고 너무 춥고 외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누나의 치부(?)까지도 들려주면서 늘 나와 그 남자아이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 스터디 카페에서 여느 때처럼 알바를 하고 있었다. 8개의 방이 모두 구분되어 개별 문이 달려있다. 음료나 빵, 핫도그 등을 주문할 수 있고, 우리는 직접 갖다 주는 서빙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문은 무거운 철문이어서 음료를 3~8잔 정도 한꺼번에 가져가면 쟁반이 휘청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나는 한 손으로는 쟁반 밑을 잡고 한 손은 문을 살짝 당긴 후 발 끝으로 빠르게 문을 지탱하고 끼익 열면서 음료를 서빙한다. 오늘 저녁 시간대에는 1번 방의 남성분이 나와서 아이스 초코 3잔을 주문했다.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초코 분말을 녹이고, 다시 얼음을 타서 시원하게 만들고, 미리 세팅해둔 얼음 잔에 부어 3잔의 아이스 초코를 완성했다. 이제 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주문한 남성분이 갑자기 문을 열고 있다. '오잉 더운가?' 싶었다. 오늘따라 갑자기 낮에 28도까지 올라가며 에어컨을 틀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내 예측은 틀렸다. 음료를 서빙해온 나를 위해 문을 열었던 걸 깨달았다. 한잔 한잔 책상에 내려놓고 다시 나갈 때까지 문을 열고 있다가 다시 닫았기 때문이다. 음료를 가져오는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미리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런 적은 또 8개월 알바 사상 처음이라서 당황스러운 감정을 감추느라 혼났다.


마감 직전에는 설거지가 밀리면 시간이 많이 소비되어 마감 10분~20분 전쯤에 미리 다 먹은 컵을 회수한다. 아까 아이스초코 3잔을 선사한 방에 들어가 다 드셨다면 빈 잔을 치워드려도 될지 물어봤다. 흔쾌히 컵을 모으는데 '3잔 한 번에 들고 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안 무거우시겠어요?' 란 문장을 들었다. 나는 과도하게 씩씩한 말투로 '네 가능해요!!!!!!'라며 컵 하나는 팔 안쪽에 끼고 나머지 잔을 손에 건네받아 나왔다. 충격이다. 저 남자 너무 '서윗하다'란 말밖에 생각이 안 났다. 그냥 스윗Sweet한게 아니라 서윗하다란 느낌이었다. 스윗과 서윗의 차이는 나도 모른다. 스윗하다란 말로 모자란 건 분명하다.


이때 다른 방에서는 매주 월요일마다 얼굴을 보는 단골손님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저기요' '아가씨' '학생'이란 말 대신 늘 '매니저님'으로 부른다. 매주 3일씩 아르바이트를 총 8개월을 하면서 나한테 '매니저님'이란 호칭을 쓰는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처음에는 '사장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사장님이 매장에 온 이후로 사장이 따로 존재함을 인지했던 건지 이후에는 '매니저님'으로 불러준다. 그는 늘 미안해하며 커피를 주문하고, 얼음을 더 달라하고, 옆방이 너무 시끄러울 경우에도, 방안이 너무 춥거나 덥더라도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나에게 부탁을 한다. 방금 나간 방을 치워주는 경우에도 너무 깨끗하게 하실 필요 없다, 자신은 괜찮다며 대충 해달라고 말한다. 늘 그리고 결제를 하고 나갈 때마다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하면서 꼭 눈을 마주치고 싱긋 웃으며 나간다. 암튼 이것 말고도 더 있는데 나한테 늘 신경을 써가며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대표 고객(?)이다. 그들은 그냥 친절한 것도, 몸에 친절함이 타고난 것도 아니다. 내게 늘 친절하려고, 웃는 얼굴로 인사하려고, 고맙다 인사 한마디 더 건네려고 일부러 신경을 쓴다. 신경써서 친절하려고 하는 태도와 행동이 나를 자주 기쁘고 조금 울컥하게 한다.


여섯 살의 트루럽에서 알바생의 감동 사연으로 귀결되어버렸다. 세상에는 다양한 트루럽이 있고, 조그만 스윗함에 감동받은 오늘이었다. 똥싸개 옆을 지켜준 6살만큼은 아니더라도, 조만간에 서윗한 트루럽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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