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빵장수 Oct 11. 2020

못된 사원으로 살아남기

신입사원으로 살아간 지 어언 10개월 차,

이제는 대놓고 신입으로 부르기 약간 애매한 시기다. 언젠가 회사 상사가 '이제 신입은 아니지 않나?'라고 조금 비꼬는 말투로 물었을 때 나도 묻고 싶었다. '이제 그만 무능해도 되지 않나?'

암튼 점점 더 속이 문드러진 진정한 회사원이 되고 있다.


그간 회사에서 배운 건 뭐가 있을지 고민해봤는데, 단연 내가 배운 건 이것이다.

'차가운 사람이 되는 것'


나는 그동안 무르고 착한 태도로 지적을 여럿 받았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못되고, 남보다 나를 더 생각하는, 차갑고 냉정한 자세가 오히려 회사에서는 인정받는구나란 점이었다. 이 사실을 몸서리치게 배웠다.


나는 어떻게 못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안에 못된 자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도 욕을 하고 못된 생각을 하고 역시 나를 1순위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턱 없이 부족한 '못됨 게이지'를 가지고 있었다. 예는 다음과 같다.


예시 첫 번째, 다른 팀에서 요청이 들어왔는데, 나는 이 요청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팀원들과 공유한다. 그리고 욕을 먹는다. 내가 생각했을 때 타 팀의 요청이 합당하고 도움을 주기에 명확한 과제임에도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리고 을과 같은 애티튜드를 보이면 안 된다는 것도. 나는 갑인가? 그들은 을인가? 여기서의 상하 관계는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예시 두 번째, 늘 우리가 늦게 확인을 해주는 타 팀이 있어 메일로 답변을 보내며 늘 고생하신다고 적었다. 그리고 바로 호출당해 욕을 먹었다. 우리가 감사하다고 할 만큼 그들이 주어진 업무를 잘하고 있지 않고, 무엇보다 일전에 그들과 상사가 싸운 적이 있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나는 불과 몇 걸음 떨어진 다른 팀의 심지어 대리님에게 메일로 감사 표현을 하고 욕을 먹었다. 아무래도 감사함도 남발하면 안 되는 귀한 애물단지와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마지막 예시, 칼퇴근이란 본 적이 있긴 한데 잘 안 보이는 새벽안개 같은 존재다. 어쨌든 있긴 있는데 금방 사라져 버려서 잘 못 보게 된달까. 암튼 저번에는 상사가 일전에 퇴사한 직원을 두고 'A는 퇴근을 너무 일찍 한다'라고 나무랐다. 나는 들으면서도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지나간 사람의 지난 과오를 나에게 털어놓는 것일까. 그보다 정해진 시간에 집에 가는 것이 과오인 걸까. 무엇보다 상사는 누구보다 늦게 정해진 시간을 넘겨 출근하고 누구보다 일찍 칼퇴근을 한다. 일을 잘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것이 진짜 실력에 의한 것이더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고 얄밉다. 게으른 사람의 성과는 고개를 힘껏 내저어서 부정하고 싶다.


암튼 저번에는 매일 조금씩 야근을 하는 나에게 왜 칼퇴를 못하느냐고 성을 냈다. 업무 시간에 집중하면 다 끝낼 수 있지 않느냐면서 옆에 항상 같이 야근하는 대리에게는 한마디 하지 않고 모두가 앉아있는 그 시간에 나에게 소리소리 지르며 성을 냈다. 그 일을 당신이 시켜서, 또는 당신이 안 해서, 또는 당신이 떠넘겨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혹시 큰 소리로 웅변해도 되는 것일까.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일화는 드라마 이외에는 벌어진 적이 없는 것 같아 함구한다. 나는 눈 앞에서 입으로 헛소리를 삼키지 못하고 뱉고 있는 그를 보며 한 귀로 얼른 흘려보내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생각하면 할수록 이렇게 살다가 회사에서 냉혈한이 되었을 때쯤 고속 승진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승진보다는 착한 바보로 살고 싶은 것이 요즘 가장 큰 소원이다.

이전 07화 [취준르포]좋아하는 일을 할건데요, 그거 쉽지 않네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