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역버스 8년차
버스는 말 그대로 베이스 캠프다.
버스에서 얕게나마 잠도 실컷 자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버스에서는 풀어진 자세로 있고 급할 때는 화장도 가능하고 책도 읽고 노트북도 한다 시험공부도 몇과목이나 했는지 모른다 최근에는 법을 공부하는 여성분을 보았는데 대단하다고 느꼈다. 아침마다 버스 시간이 겹쳐서 마주치는데, 여성분은 내게는 가장 졸린 이 아침에도 똘망한 눈으로 이미 여러번 본 것 같은 낡은 책을 읽어내려갔다.
입사 후 회사 사람들이 나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두 가지다.
'집이 멀지?'와 '자취 안해?'
이름이 무어냐고 물어보는 질문과 거의 동급으로 많이 답하는 듯 하다. 경기도에 살면 자취를 하는게 정답이고 효율적인 인생을 개척한다고 사는 모양이다. 저번에는 회사사람이 경기도로 하루 편도 2시간을 갈 경우 한달 평균, 1년 평균 소모하는 세월을 계산해서 일러주었다. 집에 가는 내내 이 친절하고 겁나 무례한 사람을 속으로 욕했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소모한다고 길가에 버린다고 좀더 놀고 좀더 연애하고 좀더 많은걸 보고 듣는데 쓰라고 말한다. 내 시간인데도 나보다 더 아까워 한다. 오늘 나는 또 다시 버스에서 잔뜩 풀어진채로 모두가 공통적으로 1시간동안 동지처럼 타고가는 이 버스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한번 더 느꼈다. 이 버스에서 나는 시간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랐다. 오만가지 감정을 느끼고 하루의 감정을 정리했다. 그날의 감정과 일과를 소화하지 못한 날에는 곰곰히 씹어보면서 돌아보기도 했다.
2017년의 어떤 하루, 그 버스 안에는 인턴을 하던 내가 있었고, 버스에 있는 내내 눈물이 안 멈춰서 곤욕이었다. 목도리 속에 파묻혀서 울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는 서로의 생일을 어쩔수없이 꾸역꾸역 케이크를 사고 나르며 챙겨주는 문화가 만연했다. 평소에도 팀원분들과 사이는 좋았지만, 나는 기대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놀라고 축하를 받는 그 생일 축하를 위한 의례적 행사가 늘 숨막히듯 불편했다. 당일 드디어 생일이던 나는 긴장감 넘치는 하루를 보냈다. 카톡 알림이 뜨는 게 부담스러워 알림도 미리 며칠 전에 해제해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턴은 회사 포털에도 공식적으로 생일 공지가 안 뜨니 카톡 알림을 비공개로 해놓으면 아무도 몰랐다. 왜 그렇게까지 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숨긴채 생일을 몰래 지냈다. 친구들이 카톡과 전화로 축하 연락을 해도 의연한 척 하루를 넘겼다. 그리고 그날 밤, 갑자기 야근 명령이 떨어졌다. 집에 가서 가족들이랑 미역국이라도 먹어야지 싶어서 일을 후다닥 끝냈지만 이미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회사에서는 공식적으로 10시부터 야근택시비가 지원되는데 선배가 9시 50분에 들어가라고 했다. 얼른 가라고. 10분 기다려서 택시타고 가면 될텐데 저 양반은 지 돈도 아니면서 쪼잔하기도 하지 하며 온갖 욕을 속에 꽉꽉 눌러담고 나는 그날도 이 버스를 탔다. 그리고 출발한지 1시간쯤 된 강동 쯤에서 11시 59분이 지나 12시가 됐다. 생일이 지났다. 그때 건넜던 천호대교, 천호대교는 늘 예쁘게 빛나는 올림픽대교와 야경과 한강과 도로위 아파트의 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걸보려고 매일 왼쪽에 같은 자리에 앉는다. 늘 갓 상경한 사람처럼 다리의 야경을 보는 나는, 그날 하루종일 생일이 아닌 척하는 별것아닌 행세를 한 자신이 바보같고 속상하고 서러워서 울었더랬다. 아무래도 바보는 맞는 것 같다. 그거 말하는게 뭐가 그리 어려웠을까. 울면서도 기필코 여기보다 더 좋은 광고회사를 가야지하고 별것도 아닌 다짐을 힘차게 했던 내가 너무 어리고 그립다.
1시간은 무조건 고속도로를 타니 별일이 생기는 날이 있다.
매일 공모전 준비로 커다란 노트북 가방을 가지고 다닐때, 특히 지금보다 사람이 많이차서 쉽게 만차가 되어 서서가던 날이면 가방을 들어주겠다며 무릎을 툭툭 치며 손내미는 아저씨나, 기침이 멈추지 않아서 몇분을 콜록대던 겨울날, 가방을 뒤져서 누룽지 사탕 두어개를 손에 쥐어 주시던 할머니까지. 우리는 이름도 성격도 모르지만 매일 비슷한 시간에 만나며 같이 자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