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내셔널 갤러리 앞 슈퍼마켓, 그곳에 소중한 것을 두고 왔다.
#이날의 필름- 런던의 점심시간과 직장인 DAY 1,2
1.1등석과 그 외
여행 첫날에는 뭘 했냐 하면, 머리 털나고 가장 멀리 떠나는 둘째 딸을 위해 온 가족이 공항까지 배웅을 해줬다. 가족과 인사하고(엄청 쿨하게 금방 가버려서 심심했다), 잠깐 쉬다 보니 내가 무려 런던행 비행기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이때까지 내 생애 가장 긴 비행은 일본 여행이었다. 이랬던 내게 10시간 장시간 비행은 처음인지라 일단 게임을 조졌다(!). 기내에 설치된 화면 속 게임을 순서대로. 오목부터 스도쿠, 핀볼을 차례차례 부수며 일단 랭킹권에 진입했다. 닉네임까지 HY, 이니셜을 박으면서 만들었는데 다들 닉네임도 안 지은 초짜였다. 나만 열심히 하는 것 같은 기분에 조금 시시해져 버려서 게임은 그만뒀다. 다음으로는 귀호강하기. 유희열의 스케치북, 콜드플레이 공연 현황을 보며 와...진짜 소름 돋는다...하며 즐겼는데도 웬걸 비행시간이 남았다. 두근거려서 잠은 안 오는 와중에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와 띵띵 붓고 엉망인 얼굴을 셀카로 남기다 보니 10시간의 비행을 겨우 마쳤다.
수속을 하는데 일단 외국 사람이 참 많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있었다. 2시간 이상 수속 시간이 걸렸다는 것. 1등석을 먼저 수속해주느라 몇 대의 비행기에서 쏟아져 나온 '1등석 외'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섰다. 즉 수속도 못하고 2시간 정도 서있었다. 우리도 얼른 열차를 타고 숙소에 체크인을 해야 했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이때 뒤에 계신 외국인 부부가 우리와 대화도 하면서 찬찬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답 없이 길어진 대기시간에 분노하셨더랬다. 차분하게 줄을 서있는 우리와 달리 직원을 부르고, 빨리 처리해달라고 요청해주신 덕분에 우리도 어찌어찌 수속을 통과했다. 이때 화통한 수속관이 입국 도장을 팡! 팡! 찍어주고 친절한 미소를 날려주어서 단숨에 장시간 웨이팅은 잊고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우리의 여행이 잘 맞았던 건 이토록 단순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공통점 덕분인 듯하다.
얏호!(신난 친구) 숙소가 무려 역에서 도보 3분...!? 숙소를 떠나는 길부터가 일단 여행이었다. 차원이 다른 낯설음이 그곳에 있었다.
일단 '시차'라니! 난생처음 시간 차이를 겪었다. 나는 깨있는데, 우리 가족들은 자고 있는 건가...? 한국은 동트기 전 새벽이란 건가....? 지금 국제전화를 걸면 엄마도 아빠도 성질 못된 언니도 바로 전화를 받을 것만 같았다. 물론 아쉽게도 전화를 걸지는 못했지만. 숙소부터 찾아 나섰다.
길치인 나는 공간지각력(?)이 참으로 약하다. 기업 인적성 시험을 볼때도 느꼈던 점이다.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것은 2015년에 일본 삿포로로 3박 4일 여행을 언니와 떠났을 때다. 우리 자매는 서로 각자 다른 시간, 다른 항공편을 예매했고 예약된 호텔에서 바로 만나기로 했다. 일본 여행을 5번은 갔는데도, 일본 특유의 복잡다단한 지하철 노선은 마른 세수를 유발했다. 하아...아무리 들여다봐도 내가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에 내려야 할지 구분이 도통 힘들었고, 개찰구 찾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 빠져나오기 힘든 지하철의 덫에 나는 늘 빠져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 역에 내리긴 내렸는데, 그 후에도 길을 가던 현지 남성분에게 여쭤봤다. 내가 풍기는 쎄-한 길치의 뉘앙스를 느끼셨는지, 날 어여삐 여겨 호텔 근처까지 직접 데려다 주시기도 했다. 문제는 데려다주신 호텔 코앞에서 호텔까지 가는 약 1분 내의 길 안에서 또 방향을 잃었다는 점. 당시 언니 말로는 언니는 호텔 앞에서 내가 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데(나는 몰랐다), 눈 앞에서 내가 자신있는 발걸음으로 옆길로 새는 것을 봤다고 한다. 언니는 그때 '쟤 진짜 멍청...길치구나...'라고 깨달았다. 그후로도 그녀는 나의 길 안내를 잘 믿지 못하는 눈치다.
암튼 런던에 도착한 여행의 첫날은 킹스크로스 역에서 도보 5분 미만인 숙소를 찾아가는 것이 미션이었다. 가는 길도 훈훈하기 그지 없었다. 어떤 남성분과 부딪혀서 지하철 문 밖으로 넘어갈뻔했는데, 'Sorry' 하면서 나를 잡아 올렸다(?). 대학교를 다니는 5년간 아침저녁으로 하루 평균 4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나였다. 부딪히거나 발을 밟혔을 때 '미안합니다'라고 벙긋 하는 입도 보기 힘들었다. 그덕에 지하철에서 가벼운 발밟힘 정도야 가벼운 조소로 넘길 수 있고,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열릴 때 사람들이 내리기 전에 비겁하게 먼저 밀고 타려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어깨죽지로 막으면서 힘차게 내리곤 한다. 마치 정의의 사도같으면서도 성격 나쁜 인간의 양면을 가지게 되었달까. 암튼 이랬던 내게 부딪힐 때마다 사과하는 이 도시의 사람들은 적잖이 감동이고 충격이었다(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도착 후에도 킹스크로스 역 안 스타벅스부터 서점 사장님 등등 물어가며 길을 찾았다. 다들 늦은 시간임에도 웃으며 친절하게 도움을 주었다. 이토록 멋진 풍경에 멋진 사람들이라니! 콩깍지가 씌었던 걸 수도 있지만, 역시 사람에게 받는 기억이 진하게 남았다. 첫 여행지인 런던에 대한 기대감이 나도, 내 친구도 낮았던터라 나와 내 친구는 아직도 우리가 걸어다녔던 여행지 중 제일 좋았던 곳으로 '런던'을 꼽곤 한다.
2. 한국인에게 가장 매운맛
넌 내게 치명타를 줬어...★ 첫날의 마무리로 숙소에서 칼칼한 신라면을 먹었다. 첫 숙소였던 런던의 한인 민박은 무엇보다 저렴한 숙박비가 장점이었다. 저렴한 가격 대비 최고의 서비스가 있었는데, 매일 저녁 한식을 무한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맛도 좋았다는 것, 그리고 하이라이트로 주방에 있는 찬란한 신라면과 짜파게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한달 유럽 배낭여행 필수품 리스트에는 '컵라면'이 꼭 들어간다. 아무리 한국에서 파스타고 햄버거고 많이 먹으며 느끼한 맛에 익숙해져 있어도 소용없다. 한달간 한식 없이 살다보면 파스타를 먹다가도, 햄버거, 피자를 먹다가도 위에 고추장을 두어바퀴 휘둘러서 먹고 싶은 충동이 든다. 나도 몰랐는데, 나 느끼한 것도 잘먹고 음식 잘 안가리지! 하고 캐리어에 컵라면을 단 5개밖에 안 가져갔던 자신을 깊이 반성한다. 한달간 한국 음식 뽐뿌가 올때마다 한가락 한가락 아껴먹어야 할 소중한 컵라면을 이 한인 민박에서는 아낄 수 있다. 이건 굉장했다. 추가로 한국에서는 귀한 줄 몰랐던 물도 먹을 수 있었다. 정수기는 없었지만, 정수 필터로 걸러진 물을 먹을 수 있었기에 최고의 숙소 중 하나였다.
암튼 첫날부터 라면을 먹었는데 먹다 보니 신라면이 치명적이게 매웠다. 한국인의 매운맛이긴 한데 이렇게 토종 한국인한테도 치명적이게 매웠던가... 싶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너무 매워서 눈앞이 아롱거릴 정도였다. 먹다보니 머리가 핑 돌고 눈 앞의 라면, 라면을 같이 먹던 친구의 모습이 뿌옇게 초점이 흐려져갔다...그때 민박집 스태프 언니 말로는 해외에서 파는 신라면에 할라피뇨가 들어있어서 그렇단다. 다시 생각해도 정신이 몽롱하다.
3. 헬로 어게인, 그를 찾습니다
주책바가지 나오자마자 물 사진 찍음(하핳) 암튼 런던 이튿날, 버킹엄 궁전 교대식을 보러 갔다. 교대식도 보고 근처 세인트 판크라스 공원도 걸어보고 길 따라 쭉 걸었다. 카페를 찾아 내셔널 갤러리 근처까지 쭉 걸어갔는데, 카페 대신 마트에서 목을 축일 겸 물을 사 먹기로 했다. 약 40일간 여행 중 내 유니온페이 카드는 은근히 해외에서 결제가 안 먹히는 곳이 많았다. 이날 마트도 그런 경우였다. 더욱 민망했던 것이 직원이 엄청 차가웠다는 것.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결제하는 손놀림이나 눈빛이 싸늘하다 못해 우리 보고 얼른 마트에서 나가라는 느낌이었다.
암튼 이 쌀쌀맞은 직원에게 결제한 물 한 병씩 각자 손에 꼬옥 소중하게 쥐고 점심거리를 찾았다. 마트 바로 길 건너편에 있던 핫도그 노점상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저찌 핫도그를 주문한 것까지는 무사했는데 핫도그를 먹다보니 시원한 콜라가 절로 생각났다. 그러나 근처에 콜라를 살 만한 곳은 방금 다녀온 매몰찬 슈퍼마켓뿐이다. 우리는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마트에 들어갔다. 워낙 좁은 마트 사이사이가 결제를 기다리는 사람들 줄로 가득 찼다. 한 바퀴 빙 돌아서 줄을 서있었다. 줄이 점점 줄어드는데, 제발 아까 그 남성 분만은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 내 앞에 서있던 사람마저 결제하러 떠나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하필 피하고 싶던 그 차가운 직원의 결제 차례였다. 바닥에서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어거지로 질질 옮기며 우리는 계산대에 콜라를 뻘쭘하게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그 직원분이 우리를 보고 'Hello Again'란 말과 함께 씩 웃었다. 감히 백만 불짜리 미소를 보았다고 기억한다. 진짜 어쩌면 너무 감동적인 순간에 후광 백라이트가 약간 비추는 것도 맞는 것 같다. 조금 눈부셔서 제대로 못 쳐다본 것이 한이다. 갈 때도 Have a nice day라고 해서 또 감동받았다. 남자 친구가 있던 내 친구도 저 사람과 순간 사귀고 싶었다고 밝혔다. 우리는 이날 이후 숨 쉬듯 'Hello again'을 수백 번 말하게 되었다. 조금 오바해서 국제결혼의 가능성에 대해서 친구와 마트를 나온 후 핫도그를 먹으며 토론을 했다. 요즘 시대에 사랑만 있다면 국적은 소용없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 서로 국제 결혼을 해도 적극적인 응원을 보내겠다는 마무리를 지었다.
헬로어게인이래 흐흐 비록 마성의 Hello again 청년은 나와 내 친구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여행지에서 만난 우연한 사람들과의 작은 기억들 덕분에 다시 그 곳에 가보고 싶게 된다.
+이날의 순간포착
내셔널 갤러리 앞에서 헤드뱅잉 하던 할아부지.
사진보다 눈으로 담는 것이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