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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빵장수 Nov 03. 2019

스타벅스에서 삥 뜯기기

 나는 스피드에 탐닉된 현대인답게 사이렌 오더로 주문한 그린티 레모네이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자동의 스타벅스는 웨이팅이 1도 없었다. 드레스코드라도 맞춘 냥 까마귀 떼처럼 검정색 옷차림의 회사원으로 카페가 꽉 차는 점심시간 피크를 막 지났다. 콘센트가 바로 밑에 있는 자리, 즉 노트북족의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백팩에서 낑낑 대며 노트북 파우치를 빼냈다. 3kg의 살인적 무게와 충격적 귀여움을 자랑하는 애물단지다. 초고스펙 게이밍 노트북이라 샀었지. 그렇게 벌써 4년째 성능이 겁나 좋은 컴퓨터 본체를 들고 다니는 기분다. 파우치 속에서 노트북을 꺼내 충전기도 연결하고(오래 있을 거란 뜻이다), 라이언 마우스패드 위에 마우스도 살포시 올려놓았다. 즉 대서사시 녹여버릴 자소설 집필을 위 모든 준비를 끝냈다.


그때 주문한 음료가 완성되었으니 가져가라는 스타벅스 어플의 알람이 울렸다. 곧장 카운터에 가봤지만 내 상큼한 그린티 레모네이드는 없었다. 완성된 음료가 단 한잔없었다. '이거 어떤 자식이 가져갔나.' 바로 남 탓을 속으로 시전하며 직원분께 급하게 물어봤다.

-방금 나온 그린티 레모네이드 누가 가져갔나요?


직원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금 들어온 주문에 그린티 레모네이드는 없다'고 했다.

-혹시 사이렌 오더 하셨나요?
-네(억울한 눈망울로 끄덕이며)
-핸드폰 줘보시겠어요?
-네애(침착하지만 간절하게)
-아무래도... 정자역점으로 시키신 것 같아요...

내가 서 있는 이 한적하고 평화롭고 노트북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는 곳은 정자점, 밖에 나가서 10분만 걸으면 정자역점이 있단다. 정자동에는 스타벅스 정자역점과 정자점 두 곳이 불과 도보 10분 차이로 있다. 나처럼 바보 같은 실수를 한 사람들을 위해 예전에는 잘못 주문된 사이렌 오더가 취소가 됐지만, 그런 기능도 이제 없어졌다고 했다. 마침 주문도 없겠다 빈손으로 쉬던 바리스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내 얘기를 듣고자 모였다. 짐 챙겨서 얼른 가라고 쫓는 대신, 음료를 테이크아웃으로 가져오시면 머그컵에 다시 따라드릴 테니 천천히 다녀오시라며 세 명의 바리스타가 입을 모았다. 그렇게 따뜻한 바리스타 세 분의 환대를 받으며 정자점을 떠났다. 짐을 다시 싸서 정자역점으로 가기엔 내 자리가 너무 명당이었다.

나는 소문으로만 듣던 '카공족 노트북을 훔쳐 다니는 도둑놈'의 표적이 될세라 다시 노트북을 귀엽고 노란 라이언 파우치에 낑낑 넣었다. 파우치를 다시 백팩에 넣고 지퍼를 완전히 왼쪽으로 돌려 꽉 잠갔다. 정자역점으로 잰걸음으로 가는 내내 스타벅스 앱에서 고객님의 음료가 완성됐으니 가져가세요, 주문이 완성되었습니다, 아직 기다리고 있어요- 라며 알림에 문자메시지까지 연달아 보내며 독촉했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고생은 스벅 앱이 다 했다.


'효뇽 고객님 음료 나왔습니다'

라고 정자역점 바리스타님이 목청 높여 열댓 번 불렀을 생각에 무지무지 죄송해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열이면 열 명 정도가 '호농' 고객님이라고 잘못 부른다. 발음하기 어려운 걸 뻔히 알면서 닉네임을 바꾸지 않은 나 새뀌를 진심으로 꾸짖었. 머그잔에 담긴 음료를 화도 안내시고 테이크아웃잔에 웃으며 담아주셨다. 따뜻한 세상. 따스한 스벅. 제발 스타벅스에도 진동벨이 생겨주소서. 이 좋은 현대 사회에. 백번 후회하며 가자마자 죄송하다고 얼른 조아렸다.




맘 잡고 다시 노트북마우스패드와 마우스까지 꺼내고 이어폰 줄을 살살 풀어서 귀에 꼈다. 자소설의 위대한 도입부를 쓰려는 찰나였다. 왼쪽 옆에서 누가 바짝 서서 고래고래 큰 소리로 떠들었다. 후방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소파에 앉아 있었던 나는, 누가 이렇게 문 앞에서 떠드나 싶었다. 그때 뭔가 왼쪽 뺨 앞에서 훌렁 나풀댔다. 돌아보니 눈 앞의 흰색 봉투. 속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돈뭉치...! 돈...? 돈 봉투는 위아래로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폰 너머로 떠드는 사람들은 무리가 아니라 단 한 명의 할머니였다. 왼쪽으로 살짝 올려보니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고 봉투를 흔들며 할머니의 입이 움직였다.


-비싼 커피는 맨날 처먹으면서, (웅얼웅얼)

-???


나는 사실 가는 귀가 먹었다. 귀가 어두워서 친구들 말에 다시 '응? 음? 뭐라고?'라고 반문하고, 그런 내게 친구들은 왜 이리 귀가 나쁘냐며 욕과 한탄을 가득 주기도 다. 대충 발음만 유추해서 알아들은 척하면 알아듣는 척하지 말라며 적발되는 속이 뻔히 보이는 표정을 가졌다. 이렇게 청력에 약한 내게 할머니의 말은 발음도 잔뜩 뭉개지고 소리도 작아서 잘 안 들렸다. 그 와중에 '비싼 커피는 처먹으면서'라는 디스랩은 정확한 딕션으로 때려 박혔다.


나름 예의 빼면 시체기에, 유교 문화에 뼛속까지 물들었기에 할머니 말을 끊지 않고 계속 귀 기울였는데 도저히 못 알아듣겠어서 가만히 있었다. 가는 귀가 단단히 먹어서 참 다행이다. 잘은 모르겠고 그냥 돈 달라는 말이었다. 프리스타일로 디스랩을 시전하던 할머니가 봉투를 다시 얼굴 앞에 들이밀며 보태라는 시늉을 했다. 16살 이후로 10년만에 삥을 뜯겨보다니. 그때는 골목길에서 일진 언니를 만났고, 나는 교통카드만 있다며 넉살 좋게 풀려 났다. 도심 중심가로 이사온 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삥을 뜯길 뻔한 기억이다. 나는 정확히 10년이 흐른 지금도 실제로 현금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체크카드나 교통카드를 통째로 적선할 만큼 밀리어네어도 아니다. 교통카드만 있다고 말하는 레퍼토리를 10년만에 뱉어봤다. 할머니가 조금 눈이 흔들리며 당황했다. 나름 무적의 비법일지도. 나저나 아까 할머니가 보여준 봉투 안에 만원 짜리만 족히 20장은 가볍게 넘을 것 같다. 파란색과 갈색 종이도 만원만큼 두툼한 두께였다. 확실하다. 할머니 저보다 부자신 것 같아요. 저도 좀 도와주세요.  커피 한잔으로 여기 오늘 스벅에서 엉덩이에 땀날 만큼 오래 있을 거랍니다. 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현금이 없어요 라고 쩔쩔맬 뿐이었다. 할머니도 불쌍한 취준생을 어여삐 여겼는지, 진짜 돈이 없다는 낌새를 맡으셨는지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지나쳤다. 다음 표적은 한 테이블 띄어서 담소를 나누던 청년 2명. 할머니는 똑같은 레퍼토리로 커피 먹을 돈으로 가여운 노인을 도우라며 봉투를 펄럭거렸다.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청년들이 어떻게 대처할지 너무 궁금해서 이어폰을 낀 채로 눈을 잔뜩 돌려서 상황을 지켜봤다. 청년 둘은 할머니가 서있거나 말을 하고 있는 게 무색할만치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단 한 번의 눈길을 주지 않은 채로. 할머니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고, 봉투를 흔드는 높낮이도 더욱 폭차가 심해졌다. 나는 이 상황에도 침착하게 무시하는 청년과 돈 달라 고성을 지르는 할머니 중 누가 더 매정한 건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인정한다. 패배를.


 초에 친구들 다섯 정도가 모여 곱창을 먹을 때였다. 꽃다발을 파는 할머니가 테이블마다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기분에 휩쓸려 우리는 꽃다발 하나를 무려 만 오천 원을 주고 샀다. 껌을 파는 분은 자주 봤지만 꽃은 새로웠다. 가격은 더 새로웠다. 빨간 장미 한두 송이에 조악한 골판지 포장지가 무려 만 오천 원이라니. 우리 동네 꽃집은 인심 좋고 포장도 기깔나게 하는데 저 정도 꽃송이는 오천 원이면 살 수 있다. 강남은 꽃 값도 비싼 건가 싶다가도, 할머니야말로 최고의 마진율을 자랑하는 장사계의 백종원인가 싶었다. 동냥만으로 생활비를 벌어 널찍한 집 한 채인가 고급 차를 장만했다는 레전드 사례 친구가 말해줬다. 나는 자소설 쓰는 건 집어치우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장사꾼이 되어볼까 고민했다. 쉽게나는 스타벅스에 대뜸 찾아와서 아무 연고 없는 청년한테 돈 달라고 봉투를 펄럭이거나, 곱창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향기 나는 꽃을 팔 정도의 배포도 용기도 없다. 나는 뭘 하면서 돈을 벌고 살 것인지 오늘도 궁금하다. 나중엔 이런 생각마저 희미해져서 회사 책상에 앉아있을 날이 금방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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