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불안과 욕망은 정책이 조정할 수 없다는 방증이었다
인근 부동산들은 하루가 다르게 벽면에 붙인 종이에 적어둔 가격을 바꿔댔다. 그러잖아도 줄어들었다던 전세 매물은 씨가 말랐다. 전세가 사라지자 매매가가 급등했다. 시누이가 올해 1월 7억원대에 구입한 옆 동네 40평대 아파트는 반년여 만에 호가 10억원을 찍었고 7억 5천이던 S아파트는 마포구라는 타이틀과 재개발 호재를 등에 업고 9억이 됐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부가 나서서 LTV니 DTV니 DSR이니 하는 것들의 규제를 더욱 옥죄는 상황에서 하우스푸어의 길을 택해도 되는 걸까? 매일 밤 시시껄렁한 남의 연애나 K리그 이적 시장의 뒷이야기나 나누던 우리 부부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하루 종일 뉴스만 켜놓고 진지하게 앞날을 의논하고 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30대 청년들, '영끌' 말고 기다렸다 사시라!”
정확한 워딩은 아니긴 하나, 축약하면 저거였다. 2020년 8월 김현미 전 장관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30대 청년은 청약 가점을 채우기 어렵기 때문에 집을 살 수밖에 없다”는 질문에 저렇게 답했다. 지금 급한 마음에 영끌을 하지 말고, 앞으로 정부가 추진 중인 임대주택 공급이 서울과 신도시에 이뤄지면 그 때 집을 사라는 거였다.
그 말이 트리거였다. 이대로 4년을 기다렸다가 남은 인생 내 집 마련은커녕 월셋집이나 전전하며 살게 될까 줄곧 불안하던 마음에 불이 붙었다. 정부는 대출을 틀어막고 다주택자에게 각종 불이익을 주고 청약을 기다리면 된다고 했지만 그 결과는 전세 매물의 실종과 매매가의 초급등과 청약 경쟁률의 급상승으로 돌아왔다. 인간의 불안과 욕망은 정책이 조정할 수 없다는 방증이었다. 정부가 하는 말의 반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바로 다음 날 부동산으로 달려갔다.
그간 대출에 소극적이던 우리 부부가 마음을 움직인 데에는 다주택자 집주인의 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40년이 다 되어가는 아파트답게 집안 곳곳은 여기저기 온전한 곳이 없었고, 계속 바쁘다며 튕기던 집주인은 수리요청사항이 한가득 쌓이자 결국 하루 날을 잡아 처리해주기로 했다. 손잡이가 덜렁거리던 부엌 찬장을 수리하던 집주인과 어색하게 스몰톡을 나누다가, 어떤 흐름에서였는지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돈을 벌려면 돈을 빌리는 데서 시작해야지. 빚 지는 거, 이자 갚는 거 무서워하면 부자 못 돼요.”
그는 재건축을 노리고 여력이 될 때마다 이 낡은 단지의 매물을 하나씩 사들였고, 지금은 옆동네 뉴타운의 신축 아파트 40평대에 산다고 했다. “다 대출로 시작한 거야. 젊은데 열심히 일해서 다 갚는다는 마음으로 접근해야지.” 어느새 반말이 되어 있었다. 자기가 세를 주는 집인데도 선심 써서 고쳐준다는 듯한 태도부터 반말까지 그닥 인간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아저씨였으나 저 말만큼은 틀린 말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 왜 빚을 두려워했을까? 근로소득으로 현금을 모아서는 절대 집값이 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지난 1년 간 지켜봤으면서. 게다가 어차피 ‘영끌’이라 해도 온갖 규제에 틀어 막혀 전체 집값의 30% 이상을 넘기기 어려웠다. 사실 초이노믹스 시절에는 70%도 흔했다. 집값이 2억이면 6천만원만 손에 쥐고 있으면 집을 살 수 있었다는 소리다. 원금의 무게도 컸지만 거기에 따르는 이자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는 돼야 영끌이니 어쩌니 할 수 있지, 30%면 영혼을 모으고 싶어도 안 된다. 도리어 합리적 소비에 가까운 금액이다. 여기까지 합리화를 마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접할 수 있는 매물의 수준은 당연하게도 별볼일없었다. 대부분의 집이 전셋집보다 볼품이 없었다. 우리가 본 매물들은 하나같이 주변에 지하철역과 상가가 없었고 산중턱이나 가파른 오르막길에 위치해 있었다. 악조건 가득한 집들 뿐이었지만 우리는 전셋집을 알아볼 때보다는 훨씬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어쩌면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를 집이었으니까.
쉴새 없이 매물을 둘러보며 고민한 끝에, 며칠 후 우리는 지하철역과의 거리도 애매하고 주변에 아파트 단지 하나 없이 빌라촌으로 감싸여 있으며 아주 가파른 언덕에 위치해 있어 마땅한 상권도 없고 노인들만 모여 살던 소단지의 22평형 아파트를 계약했다. 두 가지 장점이 있다면, 일단 복도식이 아닌 계단식이었고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동네인 서대문구 한 구석에 위치해 있다는 거였다. 장점은 그게 다였고 매매가는 4.9억이었다.
장점이 딱히 없다보니 부동산 광풍의 시대에도 그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1999년 이 아파트가 세워진 이래 실거래가가 이렇게 단기간에 폭등한 것은 처음이었다. 직전 거래는 3억원대에서 이뤄졌다.
도장을 찍기 직전, 전셋집에 들어가기 전에 매매가를 알아봤던 아파트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이 돈이면 같은 컨디션의 32평을 사고도 남았을 텐데. 이제는 거의 10억에 근접한 마포구 S아파트도 떠올랐다. 안타깝지만 다시 한 번,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아마 나중에 돌아보면 지금 여기라도 구한 게 다행이다 싶을 거야.” 시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위로했다.
새 집의 가계약금을 전달한 뒤, 우리는 부동산을 통해 다주택자 집주인에게 전세를 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며칠 후 부동산에서 만난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대뜸 물었다. “사서 가는 거예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이고, 정말 축하드립니다. 잘 생각했어요.”
불과 얼마 전 반말을 찍찍 내뱉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젠틀한 말투에서는 진심어린 마음이 느껴졌다.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살던 젊은 신혼부부가 이 혼란한 시기에 자가를 구했다니 아버지뻘 연배로서 기특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보다는 계약기간보다 18개월이나 앞당겨 전세를 빼겠다는 우리의 결단에 느낀 고마움이 더 컸을 것이다. 하마터면 이 부동산 폭등의 시기 4년 간 3억 원 언더의 금액으로 집을 빌려줄 뻔 했으니 얼마나 고마웠을까.
솔직히 말해 집주인에게 이사 비용 정도를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든 것도 사실이다. 당시 우리와 비슷하게 딱 이 시기에 전세를 탈출하게 된 이들 중 일부는 집주인에게 이사 비용 이상을 받아내는 꿀팁(?)을 인터넷에 공유하기도 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지금 같은 때에 전세를 빼주는 것만으로도 기대 수입이 확 올라갈 수 있으니 전혀 손해가 아니라서, 투머치한 금액만 아니라면 웬만해서 합의를 해 준다는 설명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장 상황이 지금과 같지 않았더라면 결코 받을 수 없는 돈을 특수 상황이라는 핑계를 대서 얻어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뭐 우리가 대단히 선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인간들인 건 아니지만, 이런 방식이 꿀팁이랍시고 공유될 정도로 당시 시장 상황이 혼란했다는 것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