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가 그런 아파트에 살아야 했다. 그것도 빌려서.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줄곧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지방 중소도시의 구도심에 걸맞게 오래된 돌기와집에 살았는데,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아빠는 그 돌기와집을 통째로 밀어버리고 새 집을 지었다. 동네를 떠들썩하게 한 대공사였다. 통나무로 멋들어지게 지은 거대한 새 집은 50년은 족히 된 돌기와집이나 빨간 벽돌로 지은 허접한 다가구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찬 낡은 동네에서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혼자만 화려한 집에 산다는 게 괜히 멋쩍었으나, 그 와중에 허름한 돌기와집이나 빨간 벽돌 빌라에 사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다른 동네의 아파트에 사는 애들에 대해서는 묘한 열등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우리 초등학교에서 ‘좀 사는’ 것처럼 보이는 애들 중에 아파트에 안 사는 건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끔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가면 획일적인 체리 몰딩 범벅으로 리모델링한 적당한 크기의 내부가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었다. 나도 정아처럼 현대아파트에, 선우처럼 삼성아파트에 살면 좋았을 텐데!
전세집을 보러 다니면서 문득 그 때 생각이 났다. 당연히 내부는 달랐지만, 모든 매물이 그 때의 현대아파트나 삼성아파트와 구조가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24평형 아파트는 어째 신박한 형태로 뽑아내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구축이라면 더더욱.
1986년부터 1999년 사이 지어진 아파트 몇 개를 연달아 보고, 이 중에서 당분간 살 곳을 하나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고향 집이 그리워졌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고향 집 사진을 SNS에 올리기만 하면 서울 친구들의 감탄 어린 댓글이 줄줄이 이어지곤 했다. “집 왜 이렇게 좋아?” 과시욕은 상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발현된다. 현대아파트나 삼성아파트에 열등감을 느꼈던 나는 그들의 댓글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꼈다. 가격 및 지역과 별개로, 그런 아파트보다 층고 높고 평수 넓은 우리 본가가 훨씬 살기는 좋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런 아파트에 살아야 했다. 그것도 빌려서!
우리가 고른 건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됐으나 단 한 차례도 리모델링이 이뤄지지 않은 북가좌동의 복도식 아파트였다. 고른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디지털미디어시티 역과 도보 이동이 가능했고, 인근에 가재울뉴타운이 형성돼 있어 도보 거리 내에서 각종 인프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본 매물 중 가격이 가장 싸기도 했다. 그 직전 해 발표된 이른바 ‘10·1 대책’과 ‘12·16 대책’으로 대출 한도가 더욱 줄어들어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7억 5천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던 마포구 S아파트를 생각하면 배가 아팠지만,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
“그래, 딴 거 볼 것 없어. 전세는 교통 좋은 게 최고야. 여기 살면서 돈 모으고, 애도 낳고 키우다 보면 청약 되고 그러는 거야.” 시어머니는 인생 첫 아파트 입성을 축하한다며 도배와 장판을 선물로 해 주었다. 도배장판을 새로 한다고 해서 낡은 걸 숨길 순 없었지만, 훨씬 깔끔해지긴 했다.
가전과 가구도 채웠다. 첫 집은 오피스텔이었던 만큼 냉장고, 세탁기,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하물며 식탁과 옷장까지 그 무엇 하나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혼한 지 2년이 되어 가던 때였으나 우리는 갓 결혼한 척을 하며 하이마트에서 가전 가격을 흥정했다.
비공식적 신혼집, 즉 원룸 자취방에 둘이 살던 대학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한 오피스텔 시절과 달리 확실히 아파트에 사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야 진짜 ‘결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껏 꾸민 젊은이들이 가득한 핫플레이스 와인바에서 마시던 칵테일은 스마트폰으로 핑크퐁 영상을 보는 아기들이 테이블마다 앉아 있는 동네 치킨집에서의 치맥으로 대체되었고, 우리만 추레한 차림이던 연트럴파크에서의 산책은 모두가 생활복 차림으로 운동 중인 홍제천변에서의 경보로 바뀌었다.
오피스텔에 살던 때와는 다른 결로 즐거운 하루하루였다.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학원, 마트, 도서관이 모두 도보 가능한 위치에 있었다. 저출생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아기를 보기 힘들던 연남동과 달리, 이 동네는 저출생 현상 자체가 무색하게 들릴 정도로 어린 아기부터 초등학생, 중고등학생들까지 아이들이 그득그득했다.
하루 시간을 내서 방문하는 테마파크 같은 연남동과는 달리,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이 동네에는 가족이 있고 생활이 있었다. 아기를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이 이 동네에서 지내는 동안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다 보면 시어머니 말대로 언젠가 청약에 당첨되는 날도 올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이 집에서 전세를 살았던 부부는 여기서 아이를 낳고 키웠는데, 몇 년 전 청약이 당첨돼 옆 동네에 생긴 새 래미안으로 갔다고 했다. 그만큼 기운이 좋은 집이니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비록 마포구 구축은 놓쳤지만 다음 기회는 그렇게 멀리 있진 않을 거라고, 나름 근거 있는 희망을 품은 나날이 천천히 흘러갔다. 늦겨울에 입주했는데, 어느새 한여름이 됐다. 불콰한 얼굴의 아줌마 아저씨들 사이 뽀로로 음료를 마시는 아가들이 섞여 있는 동네 스몰비어의 풍경이 익숙해지던 무렵이었다.
국회에서 임대차 3법이 통과될 거라고 했다.
사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우리 부부에게 나쁠 게 없는 법이었다. 2020년 2월에 들어왔으니, 2024년 2월까지 주변 집값이 얼마나 오르는지와 상관없이 3억원 안쪽의 금액으로 이 집에서 버틸 수 있게 됐으니까.
듣자하니 전셋집 주인은 이 낡은 아파트에만 가진 집이 수 채였다. 재건축을 노린 투자 목적의 소유였다. 만약 주인이 다주택자로서 각종 규제에 걸린다면, 집을 팔면 팔았지 굳이 작은 평수인 우리 집을 콕 집어 실거주하겠다고 나서진 않을 터였다. 주인이야 바뀌든 말든, 그 사이 청약이라도 당첨되면 대박이지 않은가?
아마 해당 법을 통과시킨 정치인들 역시 사람들의 사고가 그렇게 흘러가길 바랐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 싼 전세가에 만족하는 4년 사이 청약에 당첨되기만 기대하기를 말이다. 하지만 주변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