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상수의 가을 (현재)
이번 여름도 가는구나라는 말을 정확히 스물 다섯번 내뱉었을 때 진짜 여름이 떠났다. 여름은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가려다가 다시 찾아오고, 이제 진짜 가는구나 했을 때 다시 날씨를 뜨겁게 만들어 사람들이 여름에 진절머리를 느낄 때 진짜 갔다. 에어컨때문에 닫아놓았던 가게 통창을 활짝 열어놓고, 오픈 준비를 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또 1년, 1년 몇개월(여름은 항상 욕심이 많아 가을이 올 수 있는 시간을 뺏어 더 오래있곤 한다.)을 기다려야하니 어렵게 찾아온 손님, 가을을 맞이해본다.
오늘의 메뉴는 가을이 올림픽 종목이면 국가대표 급인 전어구이와 참나물 파스타이다. 새벽 농수산물 시장에 가면 제철 식재료들이 상수에게 구애를 하는듯 했다. 상수는 한 주의 마지막에 일주일의 메뉴를 선별하는 걸 혼자 집에 있을 때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준비 없이 농수산물 시장에 가서 어떤 음식을 할지 생각을 한다면 탈락되는 식재료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쉽게 메뉴 선정을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상수는 여리디 여린 상수의 마음처럼 참나물의 여린 잎들 위주로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다듬고 있다. 사실 전어 회를 활용한 요리를 하고싶었으나 가시가 많은 전어라 손질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전어를 구우면 집나간 누군가가 되돌아온다고 했으니 상수 집을 나간 사람은 없지만 일단 굽기로 했다.
오픈 준비, 음식은 다 해놓고 마지막으로 홍대 꽃가게로 향한다.
“홍대! 이번주는 촬영이 없나보네? 매일 출석하는 걸 보니.”
“이이, 왔남?”
지난번 오디션에서 최종 합격한 홍대는 시골 학교 씨름부 코치로 캐스팅 됐고, 대사에 입이 익어 충청도 사투리를 몇달 간 쓰고 있는 중이었다.
“너 그러다가 다음 역할이 서울 엘리트 역할이면 어떡하냐”
“눈이 있는겨? (내 얼굴로 가능할 것 같아?)”
“사람 일 모르는거여~”
단풍을 식당에서라도 보여주기 위해 조금 더 구수해진 홍대의 꽃집에서 색색깔의 튤립을 가져와 식당에 놓고, 최종으로 오픈 준비를 끝마쳤다.
매번 오던 평양이는 자신만의 스타성 검사를 합격하자마자 상수 식당에 발길을 끊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생 모른척 했을텐데라고 생각하는 상수다. 이름과 달리 연애 에너지가 소진될 틈이 없는 소진 씨는 한달 전 소개팅한 남자와 잘 됐는지 찾아오지 않는다. 상수는 평양이에 이어 단골손님을 잃을 줄 알았으면 소진씨의 사랑을 응원하지 말 걸 그랬다. 그가 한 응원이라고는 음식들이 파스텔 톤의 사랑스러운 그릇으로 나가는 게 전부였지만.
초록색 잎이 빨갛게 물들어가듯 상수의 마음에 그 봄에 만났던 그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 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녀에 대한 추억, 다시 꺼내면 연락하고 싶고 만나고 싶을까봐 묻어두었는데 코 끝에 가을이 묻을수록 그녀가 떠오른다. 전어를 구워서 그런가.
“제임스! 여기야, 여기. 이 동네 일등으로 가는 맛집이여.”
다른 그녀, 최수련 여사, 제임스 옆에선 앨리스로 불리는 그녀가 왔다.
그녀는 집 나간 적도 없는데 말이다.
“안녕, 아니 헬로우?”
제임스는 눈동자 색깔이 전어의 고향, 바다 색처럼 깊은 파란색이었고, 키는 홍대만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는 예상했지만 상수 또래인 것같은 이 외국인이 정말 제임스? 상수는 앨리스를 쳐다보며 ‘맞아요?’라는 눈빛을 보낸다.
“응응, 맞아. 내 남친 제임스. 오늘 우리집 놀러온다고 했는데 이 동네 핫플레이스에서 맛 좀보여주려고. 제임스 여긴 내 페이크 아들!”
“안녕하쎄요. 나 앨리스 남자친구.”
“헬로우. 아임 상수”
만약 상수 몸 안에도 입이 있으면 그 입은 벌어지고 벌어지다 못해 턱이 빠졌을 것이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이 젊은 남성과 70대 할머니의 만남이라니. 제임스네 나라 말처럼 어메이징하다.
“앨리스 능력도 좋아~ 몇살 연하남이에요?”
“사랑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여. 러브 이즈 노 넘버!”
앨리스는 한국말을 할 때 상수를 쳐다봤고, 엉터리 영어를 할 땐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이들의 사랑은 직선이 없고, 오직 곡선만 있었다. 국경과 나이라는 기준이 없고, 뜨거운 심장의 모양 하트만 있었을 뿐이니.
지나가다 보았으면 멋 부리기 좋아할 것 같은 한국의 70대 할머니, 최수련씨였을텐데 상수 식당에서 제임스의 등에 손을 두르고 있으니 그녀는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 앨리스일 뿐이었다. 상수는 자신이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설레서 가장 공간이 예쁜 1인 테이블 자리를 2인 테이블 자리로 바꿔 두사람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제임스는 서투르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고마워요”라고 했고, 앨리스는 “땡큐”라고 했다. 냄새만으로도 배부르게 만드는 구운 전어를 앨리스와 제임스가 앉은 것처럼 나란히 접시 위에 놓았고, 그들에게서 나온 깨로 만든 것처럼 고소한 들기름 참나물 파스타도 완성되었다.
제임스는 반세기 넘게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온 앨리스보다 더 정교한 젓가락으로 전어의 살을 발라 앨리스에게 먹여주었다. 그 모습을 보니 지난 여름, 두사람의 사랑을 흔들리게 한 깻잎 논쟁이 생각나 두사람 몰래 웃음을 짓는 상수다. 깻잎은 아무 잘못없다. 제임스의 능숙한 젓가락질이 잘못한 거일뿐. 앨리스가 화장실 간 사이에 제임스는 홍대의 꽃집에서 핑크색, 빨간색, 주황색, 흰색의 실거베라 꽃을 각각 한송이 씩 예쁘게 포장해 가게 앞에 서 있는다. 화장실에서 나온 엘리스가 제임스를 보자마자 제임스에게 안겼고, 그 모습을 보니 너무 오래 묵혀놔서 흐릿한 연희의 얼굴과 그녀와 관련된 추억들이 뚜렷하게 상수 눈 앞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