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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영 Jan 18. 2021

포용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을 것

[나만보시리즈] 살면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화와 슬픔을 포용하는 자세

누군가 나의 화와 슬픔을 함께 헤아려주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데 큰 위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From <time-embrace-brand> article


가끔 커피숍에 가면 잡지나 신문 한 켠에 나오는 띠 혹은 별자리 운세와 같은 것을 재미 삼아 넘겨보는 일이 있다. 거기에 적혀 있는 애정운이나 관계운을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며 최근에 있었던 일을 들추어 반추해 보곤 한다. 살다 보면, 우리가 이루어 내는 갖가지 일에는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신미한 기운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가끔 있다. 특히 누군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누구를 미워하지도, 노여워하지도 말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좁은 세상이기에 사전에 알려주는 주의사항 같다. 


결혼하기 전에는 내가 좋아하고 마음이 통하는 관계가 내 인맥의 주를 이뤘다. 그래서 사람들과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할 때는 가끔 회사와 엮여 있을 때다. 보통 내 불편한 관계의 시작은 누군가 툭 하고 던진 질문에서 무엇인가 정보를 캐듯 단숨에 달려드는 이들과 비롯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서서히 시간을 갖고 관계의 밀도를 맞춰가는 사람 사이의 온도 차라고 해야 할까. 


또, 생각의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 가는 일에는 많은 제약이 생긴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는 이기주 작가의 말처럼 말 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사는 서로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부터 다름을 깨닫고 이에 대한 적정한 온도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이것은 적정 거리를 찾기까지 반복될 것이다. 차이에 대한 인지는 보통 역지사지의 ‘입장 바꿔 생각하기’라는 아주 익숙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와 유사한 상황에 직접 맞닥뜨리지 않으면 온전하게 다름을 깨닫기까지 많은 오차가 발생한다. 


언젠가 아이에 대한 우리 부부의 교육관을 세우는 과정에서 한창 기준을 명확하게 잡지 못하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네 살 가을, 다섯 살 가을 이렇게 해가 넘어가 신학기가 돌아오면 그 해에 우리가 내린 결정의 방향이 옳았을까 싶은 고민이 가득하던 시절, 호기심이 왕성하고 사교성이 좋은 재모는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데 서슴이 없다. 아이가 잘 따라와주면 그 안에서 나도 모르게 자라나는 욕심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명분으로 모든 상황을 합리화 해 간다. 그러다 문득, 이것이 너를 위한 것인지, 훗날 우리가 소위 말하는 잘 키운 널 보기 위한 내 욕심인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왜냐하면 아이의 인생 지도를 부모라는 이유로 내가 미리 그려가는 것은 월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비슷한 또래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내 교육관을 얘기하다가 교육열이 높은 이 동네의 특성과 너무 다르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이에 대한 교육관은 각자 부모가 세우는 것이며 그것은 의견처럼 각자의 생각이 다양하게 공존할 수 있는 영역이기에, 함부로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느꼈다. 미취학 아이의 인생 경로를 미리 계획해 입학할 대학과 학과, 직업까지 부모가 정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던진 내 호기심 질문이 아마도 오해를 산 듯 하다. 


그런데 이것을 계기로 여러 상황과 관계가 점점 불편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그녀는 내게 그냥 던진 말이었지만 그것이 이 동네 사람들의 일부 목소리를 대변하는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래도 꼴등은 안돼’라는 생각이 이미 어느 정도 욕심을 전제한 생각의 연장선이 아닌가 되짚어보게 됐다. 어찌 보면 우리가 무엇인가 싫어하거나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 달라서’일까, 아니면 내가 지양하는 나를, 또 다른 내 일부를 ‘너무 많이 닮아서’일까?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남편이 ‘호기심 꿈나무’라고 별칭을 부를 만큼 내 호기심은 욕심의 또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여전히 알고 싶은 것이 많고 나이가 들어도 해 보고 싶은 일을 ‘잘 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발굴할 만큼 삶의 모든 면이 궁금하다. 아이에 대해 공부 욕심을 내라고 하면 기꺼이 욕심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재모는 늘 그렇듯 조금 삐그덕 대더라도 부모가 이끄는 대로 따라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의 의지가 아니라, 내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아이와 관련된 일은 흔들리고 망설이면서도 곧 제 자리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남편과 나는 이미 부모가 원하는 그림대로, 또 그렇게 살아도 봤기에 아이 스스로 본인의 인생을 그리며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과정인지 지금도 살면서 매일 느끼기 때문이다. 


또, 내 가족을 위해 불편한 관계를 안고 산다는 것은 애를 써야 하는 일이기에 쉽지 않다. 특히, 아이가 기관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생겨나는 갖가지 관계는 그냥 피해버리는 것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서 애매하다. 게다가 나는 한번도 싫거나 불편한 관계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 보지 않았다. 문득, 아이가 때를 부리는 혹한기 육아가 어렵듯, 내 마음이 가장 어지러운 이 때가 내 성장의 계기가 아닐까 싶었다. 아마도 적정 거리를 서로가 확보할 때까지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뫼비우스 띠 마냥 되풀이될지도 모른다. 이미 그러고 있으니까. 


그래도 불편한 관계를 보듬어보려는 노력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은 일부 이해의 감정으로 포용하게 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마음이 자란다’는 말처럼 애써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관계는 내게 풀지 못한 숙제처럼 계속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불편함을 그냥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다양성’이라는 카테고리가 미지의 세계처럼 들어와 있다. 


굳이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지금 내가 불편함을 애쓰는 이 과정이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때로는 내 아이들을, 남편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시작이 될테니까. 결국 세상은 홀로 섬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므로 말이다. 우리가 함께 마주하는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 중에서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았던 시간은 없겠지만 포효하던 분노도, 잠 못 이루던 슬픔도 모두가 어우러져 환호하던 순간과 즐거웠던 모든 것을 삶을 통해 더 깊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살면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화와 슬픔을 포용하는 자세가 아닐는지. 누군가 나의 화와 슬픔을 함께 헤아려주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데 큰 위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의지해 살기에-




* 위 글은 책 <엄마이지만 나로 살기로 했습니다(21세기북스)>에 실리지 않은 글로 나만보시리즈(나만보기 아쉬운 글 시리즈)를 통해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외 다른 글은 책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책 <엄마이지만 나로 살기로 했습니다> 브런치 독자 이벤트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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