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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헤르쯔 Sep 15. 2022

다시 그리는 그림

My Power_ 나를 믿는 힘

어린 시절 말수가 없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나는 조용히 앉아 생각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나의 꿈은 그림을 그리며 사는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림만 그리며 살 수 없었고 나는 돈을 벌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했다.


고3이 되었을 때 나는 나의 다음 스탭을 생각해야 했지만 난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 오늘 하루가 조용히 아무 일 없이 흘러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내 미래에 대해 고민해 볼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떠밀리듯 나이가 들었고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했다.


그때 나는 목표도 없고 희망도 없고 꿈도 꾸지 않았지만 그림 그리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며 몰입하는 게 좋았다. 일러스트레이터라면 그림도 그리고 밥벌이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의 교집합을 찾지 못했다. 점점 내 그림들이 문제가 있어 보였고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이 아닌 인기 있는 스타일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두들 취업을 하는데 나만 백수였다. 나는 계속해서 내 그림 스타일을 바꿔갔는데 그럴수록 나는 내가 없는 느낌 그리고 남을 따라 한다는 것이 부끄러 웠고 거기서 수치심을 느꼈다. 도저히 나를 존중해 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 건지 모르겠고 내가 이 일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꿈꾸던 대로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난 방향을 잃어버렸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림 그리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며 인정을 받는 사람들을 보고 미운 마음과 질투심을 느꼈다. 부정적인 느낌들은 나의 내부를 장악했고 불안함이 밀려와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난 정체성을 잃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수치심과 싸워야 했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겠다는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이 무엇 때문인지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인지라는 생각을  수가 없다그렇기에 아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가 태어나기 전 가지고  보호장치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림은 내가 이곳에 태어나 아무것도 모른 채 어른들로부터 받았던 상처에서 나를 지켜준 구명조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한동안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림을 놓아 버리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들이 내게서 피어났다. 처음에는 포기라고 말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포기가 아닌 용기였다.

나는 그렇게 그림을 그릴 때 느꼈던 무거운 감정과 억압들에서 풀려났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더라도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어릴 때처럼 편안히 나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나는 내가 무슨 그림을 그려야 할지도 알게 되었다. 그림은 내가 기록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기기에 글쓰기만큼이나 가장 좋은 도구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게 목표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더 잘 들어내기 위한 통로로써 나는 이 도구를 잘 활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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