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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헤르쯔 Sep 26. 2022

과거를 바꾸다

인간의 뇌에는 여러 개의 모니터 화면이 있는데 그곳에서 보이는 영상들은 대개 좋은 이야기보다 그렇지 못한 이야기들이 재생된다. 뇌의 알고리즘에 따라 반복 재생되는 그 이야기들을 우리는 별다른 생각도 의심도 없이 시청하며 '나'를 계속 그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명상에 깊이 빠져있던 그날 나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 있는, 나를 미워하는 나를 만났다. 노력하는 나를 보며 “허튼짓하네, 꼴값 떠네, 저러다 또 포기할 걸.., 네가 그걸 한다고?, 분수에 맞게 살아!”라고 말하는 내가 보였다. 처음 그 순간에는 왜 저렇게 못난 말을 내게 퍼붓고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싶었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달래도 보고 걱정도 해보고 부딪혀 봐도 소용이 없었다. 내면의 그 부정적인 소리는 계속해서 나를 막아섰고 나는 점점 진이 빠져갔다.


내 안에 깊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이러한 수많은 질책들은 늘 그렇듯 노력하는 나를 볼 때마다 불쑥 튀어나와 소리친다. 마치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인 듯이 말이다.


두통이 시작되어 명상을 그만두기로 하고 크게 심호흡을 하는데 내쉬던 숨과 함께 나의 형체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깜깜한 암흑 같은 곳에 나는 사라지고 없고 그 부정적인 목소리만 둥둥 떠다녔다. 그래서일까. 나의 모습과 함께 있을 때보다 그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닌 아빠의 음성으로 들렸다. 나는 내가 혹시 잘못들은 건 아닐까? 싶어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지만 그 목소리의 실제 주인공은 내가 아닌 아빠의 목소리가 맞았다. 게다가 그 음성은 지금의 아빠가 아닌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아빠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명상 상태였지만 나의 내면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분노하고 있었다. 나를 상처 입히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그곳을 향해 소리치고 주먹질을 하고 발로 밟았다. 그것을 지켜보는 또 다른 나(명상하고 있는 나)는 말리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한참을 그렇게 분노를 하고 나자 갑자기 울음이 터져 올라왔다. 이번에는 그 목소리를 붙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너무하다며 엉엉 울었다.

그러자 나를 힘들게 하던 그 목소리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더니 나에게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나의 반대편에는 아빠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내게서 떨어져 나간 그 목소리는 곧바로 아빠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나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아빠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반대편에 서서 바라보았는데 그 미운 말들이 사실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 아빠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아니었어...'


깊은 한숨과 함께 내 안에 뭉쳐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 순간 마음을 콕콕 찌르는 어떠한 아픔 때문에 눈물이 또다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내 앞에 어떤 아이가 보였는데 그 아이가 아빠라는 사실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사람들의 시선에 주늑 들어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애를 쓰며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내가 아닌 아빠란 걸 알면서도 살아내려 애쓰고 있는 모습이 너무 가여워서 너무 아팠다. 그제야 나는 오랜 시간 내가 아빠의 무의식까지 흡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서 온전히 떨어져 나가지 않았던 그 잔재된 무의식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이미 아는 듯했다. 나는 용기 내어 내 안에 살던 다른 이의 내면 아이를 안아주기로 했다. 숨을 크게 한번 쉬고 천천히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안아주며 "잘하고 있어.. 잘 버텼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 아이의 모습이 빛으로 빛났다. 나는 그때 어디선가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과거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는 몰랐지만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호흡을 할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 아빠로부터 들었던 말들을 하나씩 다른 말로 바꾸었고 그때마다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얼굴 표정도 함께 바뀌었다. 눈을 감고 고요한 상태에 머무르는 듯한 아빠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그 곁에 함께 있던 아빠의 내면 아이도 안심한 듯 잠이 들었다.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아빠의 영향이 나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빠에게서 받은 상처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과거의 아빠가 존재하고 있었고 나는 온전히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 경험은 과거의 아빠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안아줄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고 나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 중 어떠한 것은 나의 것이 아니란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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