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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Jan 10. 2023

유럽 여행 가즈아

퇴직 기념 여행은 이미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브런치에서 매우 흔하여 쓰기를 꺼려했던 단어를 한 번 써 볼까나. '퇴직.' 이것을 자축하는 여행을 계획 중이다. 작년 8월, 막연히 '애들 겨울방학 때 유럽행, 최소 1개월은 되어야 함'을 마음먹고, 인정 많은 남편에게 허락을 구했다. 당연히 다녀오라고 할 줄 알았기에 통보나 마찬가지였지만(여보, 고마워).


 결심을 굳힌 후 반강제로 섭외된 여행 고객들이 있었으니, 나와 같이 늙어가는 동생과 조카 둘, 그리고 항암치료 후 회복 중에 여행 소식을 듣고 합류하신 친정 고모. 우리 7명 분의 여행 코스, 숙소, 항공편, 여권 등 수많은 것들을 그간 하나씩 준비했다. 중간에 동생이 결정을 바꾼 관계로 4명 분으로 줄이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여행은 준비할 때의 두근거림과 행복한 고민으로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살면서 가장 유용한 지혜는 오직 '가성비'라 믿었던 내가, 이번 여행은 비용을 좀 치르더라도 모두의 안전과 건강에 중점을 두기로 결심했다. 아침은 유스호스텔에서 때우고, 점심은 거기에서 싸 온 과일과 빵 부스러기로 길거리에서 때우고, 저녁은 한국에서 싸 온 사발면으로 해장하는 식의 짠내투어는 대학생 때 이미 해 봤다. 우리가 그렇게 여행할 연차는 아니다.


 고모는 평생 전업주부로 근검절약하며 사셨고 장성한 아들 둘을 길러내셨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얼마 전 몹쓸 병 때문에 고생을 하셨다. 더 늦기 전에, 혹여나 또 아프기 전에 조카를 가이드 삼아 여행 가시겠다는데 뭐라 할 사람이 있을까. 내가 소위 '워킹맘'으로 동분서주하며 살아온 사연 소개는 두 말하면 눈물 나서 그만두겠다. 우리 애들은 미국에서 1년 지냈던 것 빼고는 대한민국 국경을 넘어 본 적이 없다. 큰 애 '중2병'이 도지기 전에 한 번 다녀오자, 그 생각이 나를 움직였다.


 유튜브, 카페 등 여기저기에서 여행정보를 살펴본 결과, 젊은이들의 배낭여행 버전은 아이 2명이 딸린 4인 가족에게는 당연히 맞지 않았고, 자동차 여행 버전은 운전 경력이 아무리 길어도 남의 나라에서 모르는 길을 물어가며 짐차를 끄는 게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아 포기했다(후덜덜). 호텔도 우리에게 맞지 않았다. 유럽 호텔들이 미국의 것과 같이 공간이 넉넉할 리도 없을뿐더러, 큰 방이 있더라도 엄청 비쌀 것이며, 무엇보다 삼겹살, 된장찌개, 김치볶음밥을 해 먹을 수가 없으니까.


 여행의 색깔을 정했으니, 다음으로 유럽 어디에 갈 것인지 의견을 나눴다. 눈길이 스페인, 포르투갈로 향했다가 그리스, 체코에 머물렀다가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멈췄다. 어디든 갈 생각만 해도 좋았다. 은퇴한 연령층에서 스위스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고모가 체르마트에는 꼭 가 보자고 하셨을 때 좀 놀랐다.


 9월 초 유류세가 내렸다는 소식에 항공권 예매에 착수했다. 항공권 가격을 비교하기에 '스카이 스캐너'가 좋다기에 그곳에서 검색하니, 싼 항공권을 찾기는 했다. 하지만 비행기를 1,2번 갈아타며 중간에 공항에서 쪼그리고 자야 하는 조건이었다. 아차, 가성비보다 편안한 여행이라며. '직항'이어야 함을 깨달았다. 아마도 징징거리게 될 애들, 가뜩이나 체력관리가 중요한 고모와, 졸린 눈 비비며 푸석한 얼굴로 낯선 나라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건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한 일이었다.


 이름에서 '국뽕'이 샘솟는 회사의 직항 편을 예매했다. 이 과정에서 마일리지가 많이 적립된다는 H사의 신용카드를 개설했는데, 한 달 뒤 항공사 비행시간 변경으로 취소하고 다시 예약하는 과정에서 결재액 한도초과로 결국 현금 결제를 했다. 마일리지가 쌓인다는 것만 알지, 그걸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굳이 그것까지 알고 싶지도 않으면서, 연회비 7만 원이나 주고 그 카드는 왜 개설했니. 돈 아까워서 별다방도 잘 안 가면서 비싼 커피 한 잔에 500원 적립받는 '혜택'은 나에게 해당사항 없는 얘기다. 이번 여행 준비과정 중 제일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고 자평한다.


 항공권 예매 후 숙소도 정해야 했다. 여행기간에 닥쳐서 조건이 좋지 않은 곳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에, 최대한 검증되고 안전해 보이는 곳을 선점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부 일정이 먼저 정해져야 했다. 애석하게도 '민투어'는 신생 여행사라 현지 경험이나 정보가 전무했다. 여행 카페를 뒤지고 여행사 상품 일정을 살펴가며 의사결정을 해야 했다.


 여행할 도시별로 시중에서 판매하는 여행 상품을 살펴보면서 한국인 가이드 투어나 박물관 일정을 먼저 선택했다. 그 후에 인근도시 당일치기 여행, 자유 관광 일정을 중간중간 끼워 넣어 엉성하게나마 큰 계획을 짰다. 그러고 나니 각 도시에 며칠이나 머물러야 할지 가늠할 수 있었다. 숙소 위치는 기차역으로부터 짐을 가지고 이동할 거리가 짧고, 도시 내 관광명소로 오고 가기 편리한 곳이면서, 혹시 치안 문제가 거론되는 곳은 아닌지를 살펴서 정했다.


  '에어비앤비'에서 세탁기, 건조기, 주방,  난방, 와이파이, 침대 4개 이상, 인원 4명을 검색조건으로 하여 숙소를 검색했다. 예상대로 호텔은 없었고, 아파트나 콘도 형태의 숙소들이 딸려 나왔다. 그중 리뷰 인원 수가 2자리 이상이면서 5점 만점에 4.5점 이상인 곳만 살펴봤다. 카드로 반액을 결제해 놓고 주인장들에게 나의 요구사항이 충족되는지 일일이 문자를 보내 확인했다.

 

 여행 용품도 필요했다. 아이들이 직접 끌고 다녀야 할 짐 가방, 보온만 되는 전기밥솥, 전 세계 어디에서도 전기를 쓸 수 있게 해 준다는 '어댑터'도 샀다. 소매치기가 걱정되어 귀중품을 넣고 허리나 어깨에 둘러 멜 튼튼한 가방을 구입했다. 칼질을 수십 번 해도 찢어지지 않고 가방끈을 채우는 부분도 쉽게 풀지 못하게 되어 있다니 그나마 안심이 된다. 이 가방을 메고 다녀도 나의 매서운 눈빛은 여행 기간 내내 우리 네 사람 주변을 두루 살필 테지만 말이다. 겨울철 숙소 난방이 약할 경우를 대비해서 소형 전기장판도 사람 수대로 준비했다.


  여행이 3주 남은 지금, 스위스 내의 일정은 아직도 물음표다. 숙소가 인터라켄이니 그린델발트 지역에 머물면서 그쪽 봉우리들을 섭렵할 것인지, 한국인 스타일대로 빙하 특급 열차라도 타고 스위스 곳곳을 누비고 다닐지 결정을 못했다. 들뜬 마음에 여행 서적을 읽어도 쉬이 결정이 내려지지 않는다.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진정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싶은 무의식이 막는 건가. 행복한 고민에 두근거려서 잠을 못 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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