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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Jan 01. 2023

H마트에서 웃다

Smiling in H mart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없어서는 안 되는 곳. 타지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있고 온종일 부대끼는 속을 달래기 위해 달려가던 그곳. 한국식당을 찾기 어려운 지라, 버거왕 와퍼(Whopper)와 별다방 빼고는 익숙한 맛을 찾기 어려웠던 로드아일랜드의 시골마을에서, 보스턴 근교까지 1시간 30분을 기꺼이 달려갔던 H Mart.


 미국 내 여행 숙소를 예약할 때마다 숙소 근처에 H Mart가 있는지부터 찾았다. 시카고, 뉴욕, 워싱턴. 대도시 변두리에 반드시 한 곳쯤은 있었다. 신라면, 진라면, 새우깡, 맛동산, 노란 커피믹스, 고향 만두, 순창 고추장, 종갓집 김치. 한국 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웬만한 한국 음식은 다 있었다.


 한국식으로 얇게 썰어놓은 불고기용 고기가 참 감사하다. 고기를 얇게 썰어달라고 하면 도무지 이해를 못 하던 Shaw's 정육코너 아저씨들이 야속했었다. 수산 코너에도 물에 퐁당 들어가 있거나 얼린 해산물과 언 생선뿐. 나는 반질거리는 자태로 얼음 위에 누워있는 해동된 생선이 그리웠다.


 과자는 어떤가. 초콜릿을 먹어도 이런 단맛이 아니고, 불그스레하니 감칠맛이 나 보여서 집어든 치토스는 내가 알던 그 맛이 아니다. Lay's 감자칩과 Doritos 나쵸. 과자를 두루 실패한 후, 아쉬운 대로 이 두 가지에 정착했다. 빵 코너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식빵뿐이었다. H Mart 입구에 입점해 있던 뚜레쥬르에서 5만 원짜리 작은 케이크를 보고 욕을 바가지로 했었는데, 그거라도 사다 먹어야 할 판이다.


 김치 담그는 법 좀 배워 둘 걸, 후회하기에는 늦었다. 태평양 건너에서 우리가 한국인임을, 입맛이 이토록 제대로 증명해 줄 줄이야. H Mart에서 대형 밀폐 김치통 한 개, 배추를 절이고 김치를 버무릴 큰 대야 두 개를 샀다.


 밤에 싱크대에 따뜻한 물을 받아 한국에서 가져온 천일염을 푼 다음 네 등분한 배추를 푹 담가두고, 다음 날 아침 건져낸다. 김칫소는 따로 없다. 강판에 벅벅 갈아낸 양파와 사과에, 한국에서 가져온 시어머니표 태양초 고춧가루, H mart에서 산 새우젓과 까나리액젓을 더해, 절인 배추에 버무리는 게 다다.


 무는 섞박지 형태로 큼직하게 썬 다음 따로 절이지 않았다. 국물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맛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저 비릿한 바다 내음이 나는 매콤한 채소 절임을 먹으며 고향 언저리를 맛보는 거다.


 내가 '요알못'이면서도 김치 담그기에 도전할 정도로 절박했던 이유는, 한국식이 아닌 김치는 식초를 넣은 피클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인 친구가 선물로 준 스패니쉬 ‘짝퉁’ 김치를 먹고 혀를 잃을 뻔했다. 그렇다고 비싼 수입 종갓집 김치를 매일 먹을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내가 직접 담가 먹는 수밖에. 그러나 더 맛있는 김치가 즐비한 우리나라에서, 이제는 절대 김치를 담그지 않는다.


 부침가루에 튀김가루를 조금 더한 다음, 송송 썬 김치를 넣는다. 시댁에서 담그는 김치처럼 고춧가루와 소가 많지 않기에 살짝 씻을 필요도 없다. 가끔은 칼라마리(Calamari)용으로 나온 냉동 오징어나 새우를 넣어 바다 내음을 더한다. 대파는 집 근처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쪽파를 넣어 김치부침개의 심심함을 달랜다.


 미국에서 가장 싸고 좋았던 게 고기였다. 미국 소고기를 반대하며 촛불을 들었던 뉴스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H Mart는 매일 가기에는 너무 멀다. 우리는 삼시세끼 고기를 먹었다.


 소금, 후추, 바질, 올리브유로 밑간해 구운 고기, 가끔 달걀 프라이, 파프리카, 데친 당근과 방울양배추(Brussels Sprout), 브로콜리, 그리고 ‘살기 위해 담그고 먹는’ 김치. 반찬은 이게 다다.


 H Mart에서 사 온 된장을 푼 물에, 파란 애호박(Zucchini), 양파, 두부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찌개를 끓였다. 된장찌개가 매일 같이 상에 올라왔다. 우리는 아직도 된장, 청국장이 들어간 국물을 즐겨 먹는다.


 H Mart에 가면 떡볶이 떡을 여러 팩 산다. 한 팩은 집에 도착하면 바로 물에 씻어 불린 후 떡볶이를 만든다. 나머지는 냉동실에 저장해 두고 한국이 그리울 때 떡볶이를 해 먹을 거다. '백 선생' 방식으로 만든 만능 고추장을 푼 국물에 떡볶이 떡을 보글보글 졸여 내고, 마지막에 통깨와 참기름을 듬뿍 넣어 조금 더 볶는다. 중학생 시절 큰 이모 집에 놀러 갔을 때, 사촌 언니가 해 주던 기름 떡볶이를 흉내 내보는 거다.


 남편과 나는 골뱅이 무침을 사랑하게 되었다. 소면을 삶고 채소와 골뱅이를 썰 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찬물에 담가 두었어도 여전히 매콤한 양파, 당근, 오이를 와그작와그작, '단짠단짠'한 통조림 골뱅이를 질겅질겅 씹으며 입 안에서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를 즐겼다. 초고추장과 참기름도 가세하는 환상적인 연주다. 후루룩후루룩 입에 조급히 빨려 들어온 소면이 가끔씩 열기를 식혀준다.


 매운 떡볶이를 못 먹는 외국인 친구들이 열광하던, 잡채와 김밥. 김밥은 일본인 아줌마와 메뉴가 겹쳐서 잡채를 더 자주 하게 되었다. 김밥을 만들어 나눠 먹을 때마다 힘주어 “This can’t be sushi. It is Kimbap.”이라 하며 초밥롤과의 차별점을 덧붙였다.


 당근, 양파, 버섯, 파프리카, 고기, 달걀은 구하기 쉬웠기에, 목이버섯과 시금치가 들어가지 않아 조금은 아쉬운 잡채를 만들곤 했다. 간장은 반드시 H Mart에서 Made in Korea로, 되도록 501이나 701로 사서 넣어야 한다. 한국 간장이 내가 만든 잡채를 그나마 잡채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니까.


 우리는 H Mart에 갈 때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었다.


* 사진 설명 : 미국 체류 중 다문화 지역사회의 ‘문화의 밤’ 행사에 우리 가족이 참여했는데, 그때의 상차림 사진이에요. 잡채, 된장국, 전 등 10가지 음식도, 색찰흙 혼례 인형도 남편의 도움을 받아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구절판에 고춧가루, 다시마, 멸치 등 한국 식재료를 담아 보여주고, H Mart에서 구입한 한 입 크기 약과는 후식으로 제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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