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싸기, 그리고 계획 최종 점검
떠나기 십 수일 전, 짐 가방을 싼다. 당장 떠난다고 생각하고 한 달간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모은다. 기내용은 15kg, 수하물용은 23kg. 탑승객 한 사람에게 허락된 무게다. 만약 일상에서도 정해진 무게만큼만 소유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어떤 것들을 선택할까. 내 것이었나 싶게 낯선 것들까지 끌어안고 사느라 무거워진 삶이다.
겨울철 유럽에서 한 달 지내는데 이것이면 되려나. 내 몸판보다 작은 전기장판, 손일병 핫팩 서른 개, 비에 젖어도 끄떡없고 기계 세탁해도 멀쩡한 에코퍼 목도리, 엄지와 검지에 구멍이 있는 장갑, 겨울 모자, 여분 옷, 날다람쥐로 변신시켜 주는 큼직한 판초우의, 자동으로 접히는 우산, 숙소에서 신을 지압 슬리퍼, 화장품, 여권, 신용카드, 여행수첩, 도난방지가 된다니 기특한 휴대용 가방, 휴대전화 분리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우리에게 여행 필수품이 된 보조 배터리와 유럽 USIM (Universal Subscriber Identity Module), 보온밥솥, 수저, 반짇고리, 상비약, 헝겊 장바구니, 그리고 비행기와 열차 안 쾌적한 낮잠을 위한 목베개.
세 달 전에 예약한 숙소의 방문객 평가를 지금 다시 살펴본다. 난방이 약해서 더럽게 추웠다, 수도가 터져서 씻지도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가파른 계단으로 짐을 나르느라 진을 뺐다는 이야기가 혹시 있나. 애들이 참견을 한다. 엄마가 본 좋은 평가가 '리뷰 알바'의 농간일 수 있다고.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돈 받고 쓴 왜곡된 평가라고 해도 어쩌겠나. 이거라도 살펴보며 별일 없기를 바라본다. 에어비앤비가 부디 공정한 평가 체계를 유지하고 있기를.
유럽에 가본 게 3번, 그것도 두 번 이상 방문한 곳이 없다. 스톡홀름 근교의 동료 친지 댁에 며칠 머문 걸 빼고는, 매번 좁아터진 호텔방에서 지냈었다. 사실 숙소 밖에 좋은 것들이 널려 있어서, 숙소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친구들과 각자 이불 한 장을 외투 삼아 둘둘 말고 그린텔발트 숙소 베란다 의자에 앉아 별 보며 믹스커피를 홀짝였던 게, 유럽 숙소에 대한 가장 좋았던 기억이다.
아파트나 집을 빌리는 건 처음인데, 행복한 상상을 하는 건 여행 전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우아하고 차분한 보헤미안 시크 스타일 주택', '알프스 전망의 발코니', '테라스에서 감상하는 두오모의 멋진 전망',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아름답고 넓은 테라스'. 그들의 찬사에 우리도 손뼉 치며 수긍할 수 있기를. 그 멋진 곳에서 '인증사진'을 찰칵찰칵 찍으며 행복한 한 때를 보낼 수 있기를. 예약 화면에서 본 사진이 '뻥'이 아니었네, 이 숙소 정말 잘 골랐다, 하면서 떠날 수 있기를.
이제 몇 가지 일을 마무리 지으면 된다. 우리가 갈 장소마다 주의사항이나 '고수들의 꿀팁'을 수첩에 정리해 적고, 유로화와 스위스 프랑을 조금씩 환전하고, 여행자 보험에 가입하고, 융프라우 할인쿠폰을 여러 장, 넉넉하게 출력하고, 만약을 대비해 여권 사본과 유레일 예약표 출력본을 챙기는 거다.
대학생 시절 배낭여행 중 이탈리아 열차 검표 과정에서 유레일 패스를 돌려받지 못해 승무원과 싸웠다. 둘 다 영어가 짧았고 다혈질이었다. 나보다 키도 작았던 그놈이 도대체 내 표를 어디에 팔아먹은 거냐며, 씩씩거렸다. 같이 여행 간 친구 셋이 돈을 보태주어 내 패스를 다시 샀고, 다행히 남은 여행은 사고 없이 마쳤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모바일 패스가 대세다. 이제는 잃어버릴까 봐 걱정할 필요도, 인적사항, 여행지와 일자를 종이에 일일이 적어 넣을 필요도 없다. 파리에서 로마까지 다섯 번의 이사를 해야 하는 구간은 여행 두 달 전에 인터넷 예약을 마쳤다.
대학생 때는 여름철이기도 했고 워낙 꾸밀 줄도 몰랐던 터라 얇은 옷 몇 벌 둘둘 말아 넣고, 사발면과 햇반, 볶음 고추장 튜브, 도시락 김 봉지를 몇 개씩 쑤셔 넣은 배낭 하나가 여행 짐의 전부였다. 네 명의 여장부는 용감했고, 유럽 전 지역 여행 정보를 몽땅 때려 넣은 책 한 권을 펼쳐 들고, 내일 일정은 바로 전날 저녁 유스호스텔에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결정했다. 너희 둘은 오르세, 우리는 루브르, 가끔은 찢어져 다닐 만큼 서로 쿨했고 여행 내내 한 번도 안 싸웠다. 고대의 흔적이 살아 뒹구는 곳에서 한여름밤 오페라가 열리던 '지붕 없는 박물관'이자, 짭조름한 음식이 혀에 착 감기던 '우리의 로마'에서는 하루, 아니 이틀 더 머물렸다.
현지에서 들은 억양을 흉내 내고 손짓 발짓까지 총동원해 "산타 마리~아 마죠~레"도 찾아가고 추천받은 맛집에서 '1일 2젤라또'하고, 처음 보는 이들에게도 스스럼없이 "챠우"를 외치며, 땡볕에 어깨와 광대 피부가 몇 겹쯤 벗겨지도록 알차게 돌아다녔다. 미로 같은 골목을 며칠이고 돌아도 좋았고 떠나는 날 아쉬워했다. 금방 또 놀러 올 거야 했는데, 그게 20년 후, 엄마가 되어 아이들과 다시 가는 것일 줄이야.
201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큰 학회가 열렸다. 학회에 참석한 하루 반나절을 제외하고 7,8일간 '유로자전거나라' 사이트 혹은 현지 여행사를 통해 한국인 해설 관광을 했다. 피카소 박물관, 사그라다 파밀리아, 까사밀라, 구엘공원을 비롯해, 바르셀로나를 조금 벗어나 몬세라트 수도원, 발리 보석박물관, 까바 와인농장까지 신나게 누비고 다녔다. 이제는 마이리얼트립, 클룩 등 어플에서 내가 원하는 도시, 날짜에 반나절 시내 관광, 당일 치기 근교 여행, 공인 해설사와 함께 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 등을 더 쉽게 찾고 예약할 수 있다.
오늘 새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해설사 분께 메시지가 왔다. 한국에 들어와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내가 예약한 날에 안내를 해 주기 어렵겠다고. 다행히 좋은 세상이다. 기존 예약을 취소하고 돌아서자마자 다른 해설사에게 예약할 수 있었다. 파리 근교 당일 여행, 로마 시내와 바티칸 시국 관광, 폼페이 근방을 둘러보는 당일치기 버스 여행도 예정되어 있다. 파리 디즈니 랜드 관람권, 파리 박물관과 미술관 6일 패스의 교환권도 미리 구매했고, 루브르 박물관과 오랑주리 미술관 입장 예약도 마쳤다.
나머지 일정은 희망사항들로 빼곡하다. 머릿속 사전 답사 또한 스스로 계획하는 여행에서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이건 길수록 좋다. 일찌감치 시작되면 선택지가 많아 행복한 고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최신 여행서적을 읽으며 '기본'을 배우고 체크인유럽, 스위스프렌즈 같은 카페 포스팅을 탐독하며 '최신 트렌트 적용'을 꿈꿔본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유럽의 잦은 겨울비, 긴 시간 이동이나 힘든 일정 뒤의 피로도, 혹은 마음의 변화가 우리 여정을 결정할 거다. 교통편이 좋지 않다고 포기했던 친퀘테레 마나롤라 마을에 가게 될 수도, 겨울이니 푸르름 없는 포도밭이 웬 말이냐며 배제했던 라보 하이킹이 뜬금없이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계획은 바꾸라고 있는 거고, 여행은 그 재미로 가는 거다.
나는 여행이 좋다. 새로운 풍경에 눈이 크게 떠지고, 색다른 맛을 실컷 즐겨보고, 예쁜 쓰레기들을 사 모으는 재미다. 그런데 진짜 재미는, 일상과 헤어지는 거다. 돈을 쓰려고 마음먹고 가는 거니, 주머니 사정 걱정도 잠시 내려놓는다. 내일을 미리 걱정하며 남은 시간과 에너지를 재야 하고, 남과 비교하고 주변 눈치를 살피느라 속 시끄러운 삶과 잠시 안녕이다. 지금, 여기, '나'라는 사람에 온 마음을 쏟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단순하게 살 수 있다. 오늘 이곳은 훌훌 털고 떠나면 그만이고, 여행에서 영원히 남는 건 나와 나눈 대화다.
여행은 다른 문화,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한비야-
* 참고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읽고 나면 어느새 떠나고 싶어질 명언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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