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일간 Aug 13. 2024

작은 것도 누군가에겐 큰 고마움일 수도. 그것도 꽤 큰

지금 앉아있는 공간

포비의 베이글과 커피를 좋아한다. 왜 베이글과 커피를 좋아하고, 왜 여기의 베이글과 커피는 더 좋은지 글 하나를 다 채울 수 있다. 하지만 맛은 어차피 각자의 취향 문제일 테니. 내가 기대를 높여 누군가 실망한다면 속상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맛에 대한 세세한 감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중요할 수 있는 이야기다.




스타벅스의 닉네임으로 고객을 불러주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주문번호 A-24, B-37은 전문적인 분류체계 또는 전투기 모델명 같다. 이 암호 대신 닉네임을 부르는 것은 심리적인 거리를 조금이나마 줄여준다. 가끔 닉네임을 보며 커피를 픽업하는 사람들을 매칭해 보는 것도 재미 중 하나다. 센스 있는 닉네임을 보면 이런데 재능 없는 나는 부럽기만 하다. 그래서 일찍이 포기하고 유명하지도 흔하지도 않아 착각할리도 없는 내 이름 석자를 크게 불리게 두었다.  


포비는 스타벅스와 달리 주문할 때마다 ‘어떤 이름으로 불러드릴까요?’라고 물어본다. 그리고 커피가 다 되면 그 이름을 크게 불러준다. 스타벅스에서처럼 센스가 있거나 재밌는 이름은 들어본 적 없다. 앱으로 닉네임을 정하는 게 아니고 직접 내가 대답을 해야 하기에 어찌 보면 아날로그 느낌이다.


나 같은 사람은 재미없게 어디든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 불리냐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의 이름을 물어보고 불러준다는 점에서 스타벅스보다 더 인간적으로 고객과의 거리를 줄였다. 그래서 몇 번 방문하면 고객은 심리적인 거리가 자연스레 줄게 된다. 나는 이런 작은 센스들을 정말 좋아한다. 물론 싫어하는 고객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을 말하지 않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은 사람이 내가 되었다.


정확히는 말을 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목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야가 얼마나 좁은가. 에러케이스를 찾는 게 일인 사람도 이런 걸 생각 못했구나 싶었다. 내가 좋아했던 그 특징이 나를 당황스럽게 하고 처음으로 힘들게 만들었다.


쇄골 위 조직 일부를 검사를 위해 떼어냈다. 감기 걸리면 목이 붓는 곳에나 있는 줄 알았던 림프절이 혈관처럼 온몸에 퍼져있는지는 몰랐다. 그중 일부를 떼어냈는데 그 주변 기관들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 했다.


아빠가 그리고 남편이 아프다고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치료로 입원하고 있는 게 아니면 아프기 전과 다름없이 보내려 했다. 그래서 주말의 루틴으로 아이를 댄스수업에 데려갔다. 아이를 강의실에 넣어두고 습관처럼 몇 층을 내려왔다. 치료 중에는 뭐든 맛있게 먹는 게 좋다는 선생님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주문하기 전까지는 포비에 들른 여느 날과 같은 일요일 오후였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어요?”

“…”

“네?”

“…”


아무리 소리를 내려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주말 오후 쇼핑몰은 사람도 많고 시끄러웠다. 내 목소리에 비해 주변의 소음은 더 크게 들렸다. 한참 차례를 기다렸는데 내 뒤에는 아직 줄이 길었다.


“라떼요.”

쇳소리와 바람소리가 간신히 소리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거의 울기 직전에 맞은편에 계신 분이 메뉴를 알아들었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혹시 몰라 나는 디카페인을 마셔야 했고, 그것도 오트밀크로 바꿔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을 간신히 전달하였을 때, 내가 좋아하던 그 질문이 들려왔다. 



“어떤 이름으로 불러드릴까요?”



내 이름은 발음이 어렵다. 흔하지도 않다. 대충 말해서 알아듣기도 힘들고, 대충 말하면 분명 다시 되묻는다. 한계였다. 한번 말했으나 전달이 안 된 것을 알고 포기했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을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노트 앱을 열어 화면에 이름을 적었다. 그다음 자리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목소리를 잃어버렸다는 충격과 평범하던 일상이 무너졌음을 실감했다. 수업이 끝나고 만난 아이에게 나는 애써 괜찮다고 했고, 와이프도 나에게 괜찮을 거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괜찮다 괜찮을 거다 괜찮다를 주문처럼 반복했다.




다음 주, 나는 여전히 나오지 않는 목소리와 조금 떨어진 컨디션 외에는 동일한 아빠가 되려 하고 있었다. 같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다 같은 가게 앞에서 멈추었다. 무서웠다. 두 번째면 나을 법도 한데, 처음의 기억이 떠올랐다. 딱히 갈 곳도 없었다. 커피와 베이글은 먹고 싶었다. 안되면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처럼 메뉴를 손으로 가리키고 이름은 노트앱을 꺼내 보여줄 각오로 줄을 섰다. 반복되는 일상을 다시 반복하고 싶었다.


손으로 메뉴를 가리켜 주문을 하고 핸드폰으로 이름을 보여주려고 했다.


“OO님이시죠?”


눈물이 흐르려는 걸 버텼다. 그리고 끄덕임을 크게 반복하는 것으로 감사함을 전했다. 가끔 오는 사람이고, 지난 주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이름을 기억해 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로 그분은 정말 감사하게도 내 이름을 묻지 않아 주셨다.


운이 좋게도 치료는 잘 되었고, 목소리도 돌아왔다. 그리고 나도 ‘이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해요.’라고 전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1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편히 말할 수 있는 내 이름을 오늘도 물어보지 않는다. 대신 딸아이에게 주머니에서 젤리를 하나 꺼내준다. 나의 이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는 딸아이가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며 웃는다.




고객을 대하는 사소한 차이들이 심리적인 거리를 좌우한다. 스타벅스의 그것도 나쁘지 않고 포비의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다. 하지만 그것들도 다 사람들이 한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들이 있을 수 있고, 이때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작은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겐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내 끔찍할 뻔한 경험은 오히려 고마운 기억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평생 포비가 보이면 그 기억을 떠올리며 계속 들를 것이다.


한번 더 이 글을 통해 한번 더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