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영혼을 달래는 선율
8화 여건조성작전(까나와 샤마)
여건조성작전[shaping operations]
(출처: 네이버 군사용어사전)
결정적 작전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이뤄지는 제반 작전
'예수는 하인들에게 물통에 물을 부은 후 그것을 그대로 손님들에게 내어주라고 명했다. 하인들이 그대로 하자 놀랍게도 물이 포도주로 변해있었다.'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성경 속 한 구절이다. 어느 복음인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귀에 닳도록 읽어줘서 머릿속에 남았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갈릴리 지방과 레바논 남부지방 중 어느 곳인지 이견이 많지만, 레바논에서는 예수께서 첫 기적을 행하신 곳이 레바논 까나라고 말한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전쟁과 성경 속 와인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기적을 행한 장소는 동굴이 하나 있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혼인잔치를 했다는 광장만 하나 있는데,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 성당을 다녀왔다. 공식행사를 제외한 출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까나를 갈 생각도 못 했는데, 공소로 운영되는 우리나라 성당이 안타까웠는지, 이탈리아 성당 신부님께서 직접 초대했다. 덕분에 주일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샤마 지역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 드리러 다녀왔다. 레바논에서 세 번째 소중한 여행이었다.
주일에 종교 활동을 열심히 했다. 성스러운 부분은 차치하고 귓가에 속삭이는 내 운명의 피아노 선율이 좋았다. 가만히 앉아서 성가 연주를 듣고 있으면 가끔 눈가가 촉촉해진다. 피아노 연주곡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랑스럽게 들려주는 피아노 선율이 귓가에 이르면 머리보다 눈이 먼저 반응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가끔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뒤에서 감상하면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
세 번째 여행이 시작되는 날 성당에 일찍 나가서 이탈리아 신자들에게 줄 선물과 미사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겼다. 출발시간이 10여분 정도 남았고, 내 운명이 잠깐 앉아보라고 권유하면서 몇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캐논 변주곡과 내 머릿속의 지우개이다. 내 눈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귀는 피아노 선율을 느꼈지만, 두 감각을 제외한 모든 신경은 내 운명을 향했다. 아니다. 내 운명과 묘하게 섞였다. 사랑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짧은 순간에 많은 감정을 느끼고 정신이 몽롱해질 때 즈음 진홍과 영일이 버스에 빨리 타라고 연락이 왔다. 헐레벌떡 짐을 싸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늦게 탔지만 남은 자리는 딱 두 자리뿐이었다. 보통 버스에 자리가 남으면 한 자리씩 떨어져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신기하게 적당한 위치에 두 자리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조연들이 연기는 안 하고 기획을 한 결과이다. 덕분에 한 시간 동안 이동하면서 평소 가깝게 다가갈 수 없었던 내 운명의 향기가 보였고, 가끔 스치는 옷깃과 머리카락이 닿는 소리를 감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당연히 차창 밖에서는 새파란 하늘과 바다인지 하늘 인지 구분조차 포기한 지중해 하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사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산비탈을 올라가 이탈리아 성당에 도착했을 때, 신부님께서 직접 밧줄로 당겨가면서 종을 쳤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처음 만난 형제자매를 환영하면서 미사 시작을 알리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그때부터 이탈리아는 우리 로망이 되었고, 두우모 성당이 있는 피렌체와 아그리 투리스모를 경험할 토스카나, 그리고 아말피 바닷가 산책이 버킷리스트 최상단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탈리아 말로 진행하는 미사는 생경했지만, 영어 동시통역과 오랜 시간 비슷한 의식을 행하던 사람들에게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어 가서 복음을 전달할 때까지 누군가 도와줄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선물을 주고받고 기념 촬영을 한 다음 이탈리아 영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피자나 파스타가 나올 줄 알았는데, 메뉴는 랍스터였다. 급식이 랍스터가 나오길래 우리를 위해 준비했냐고 물었는데, 평소 즐겨 먹는다고 허세 신부님이 웃으며 답했다. 국내에 있을 때 레스토랑에서 꼬리 조각을 조금 먹어본 이후로 처음 접했는데, 텁텁하기만 했던 기억에 지금도 목이 멘다. 다만,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와인이 인상 깊었다. 역시 와인의 나라답게 한쪽에는 와인 박스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식사에 와인을 곁들였다. 공식행사에서 주는 와인이라 낮술임에도 불구하고 한잔 마셨는데, 텁텁했던 이탈리아 랍스터를 넘기기에는 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식사까지 마치고 후일을 도모하면서 소중한 세 번째 여행은 끝나갔다. 가까운 까나는 가보지도 못한 채.
산비탈을 따라 내려가던 중 넓은 공터가 나왔다. 일행 중 한 명이 안전한 지역이니 기념사진 한 장 촬영하자고 제의했고, 버스를 잠시 멈췄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몇 명이 소리를 질렀다. 그곳은 우리와 지중해, 그리고 지중해 같은 하늘만 있었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성경에 나오는 물을 포도주로 만든 장소는 컴컴한 동굴이나 결혼식을 했던 광장이 아니고 이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중해와 하늘을 구분할 수 없는 천혜의 관경은 이천 년 전에도 그대로였고, 전쟁 중에도 액자 속 사진처럼 멈춰 있었을 것이다. 그 배경 속에서 한 마리 독수리가 되어 날듯이 우리는 자연을 만끽했다. 누군가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고 각자 모델이 된 것처럼 다양한 포즈를 취했으며, 하늘과 바다에 흠뻑 취해 춤을 췄다. 모두 미쳐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버스에 올라탔고, 찰나의 자유는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까나의 한 공터에서 경험했던 이상한 기분을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아쉽게도 레바논에서 여행은 세 번으로 끝났다. 세 번째 여행이 끝날 무렵 이스라엘과 레바논 정세가 악화되면서 수차례 교전이 있었고, 우리가 미쳐 날 뛰던 광야도 수십여 발 포탄이 떨어졌을 것이다. 까나와 샤마지역은 남부 레바논에서도 이스라엘과 접경했기 때문에 테러가 발생하는 지역보다 위험하다. 테러는 IED로 인한 소규모 폭발이지만, 미사일이 투발 되는 지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천 년 전 예수께서 기적을 행한 장소가 다른 어느 곳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게다가, 예수께서 기적을 행한 장소로만 알고 있었는데, 레바논 전쟁 당시 아픔이 있었던 사실은 최근에 알았다. 우리가 다녀온 날보다 5년 전에 35명 아이들이 그곳에서 학살을 당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정신을 잃고 혼이 빠져 선율을 만끽하던 광야에서 불쌍한 영혼을 달래지 못한 슬픔이 남았다. 다만, 아이들 기운이 우리에게 왔고 생경한 느낌을 크게 받아 몸짓으로 승화시켰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방문할 수 있다면 꼭 한번 들러서 아픈 영혼을 달래고 싶다. 우리 대신 박노해 시인은 아픈 영혼을 시로 달랬다.
까나의 아이야 / 박노해
포도나무 그늘 아래 뛰놀던 아이야
올리브나무 사이에서 웃음 짓던 아이야
광야의 무지개를 쫓아 달리던 아이야
좋은 날이면 예쁜 옷을 차려 입고
멀리 사진관으로 엄마손을 잡고 나가
멋진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던 아이야
너는 여기 폐허더미에 영정사진으로 웃고 있구나
너, 까나의 아이야
너는 꿈을 꾸며 잠이 들었구나
이제 너는 영영 깨어나지 않으리
너, 까나의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