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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 in Oct 22. 2023

교사와 마이크

권위와 권위주의의 중점에서


#교사 #학생 #마이크 #마스크



어느 새부터 동료 선생님들이 마이크를 하나씩 구매하기 시작했다.


10년 전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마이크를 쓰시는 분들이라면 


학교에 한두 분 계셨는데, 이제는 안 쓰시는 분이 한두 분 있다.







© reimond_21, 출처 Unsplash






마이크와 그 짝꿍인 앰프. 요즘엔 일체형으로도 나와서 집에서 혼자 노래방을 즐기려고 구매하는 블루투스 마이크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기능을 차치하고 나서라도, 마이크의 기본 목적은 '증폭'이다. 앰프라는 기계장치가 amflifier의 앞 글자만 따온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이크를 통해 들어온 목소리를 기계적인 메커니즘으로 증폭해서 내보내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선생님들의 마이크 사랑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리고 왜 시작된 것일까?







이 글은 아마도 후자에 더 초점이 맞춰질 이야기이다.



교사들의 '마이크 사랑'은 당연히 과학기술의 발달과 교육의 팽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더 많은 사람에게 같은 내용을 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의 마이크(혹은 방송) 라면 운동회나 조회, 각종 행사 때 아주 빈번히 쓰여왔다. (과거 개그콘서트의 한 개그맨은 이러한 점에 착안해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훈화가 에코와 함께 어떻게 울려 퍼지는 가로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줬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마이크가 교실로 들어왔는데, 그때 내가 기억하는 마이크와 앰프는 말 그대로 거대했다(지금 초소형이 되어버린 것에 비교해 본다면 말이다.). 휴대용이기에 '거대'라고 하기엔 좀 과장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교구에 마이크 그리고 큰 앰프를 매시간 들고 이동하시는 선생님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짠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마이크와 앰프의 목적은 증폭인데, 그렇다면 그 증폭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마 전달일 것이다. 수업내용의 전달, 혹은 호통의 전달.





아마 전달일 것이다. 수업내용의 전달, 혹은 호통의 전달.



수업이라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언어를 사용해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그 방향은 교사에서 학생에게로 향한다. 학생이 교사를 향해 발화하는 질문도 종종 있긴 하지만, 40분이라는 시간에서 학생의 발화가 차지하는 시간은 매우 짧다. 이 말인즉슨, 우리의 수업은 여전히 교사가 발언권을 독점하는 일방향적 수업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잘 들어야 하고, 교사는 잘 말해야 하는데, 이 '잘 말하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은 아니다.



학생에 대한 교사의 발화를 '발문'이라고 하는데, 수업은 이 발문들과 발문들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질문과 다르게 교사는 일정한 답을 상정한 상태에서 발문하곤 하는데, 이것은 '닫힌 발문'이다. 예를 들면, (과학시간) '물의 어는점은 몇 도일까요?' 정도가 되겠다. 반면, '열린 발문'도 있다. (국어시간)'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나요?'처럼 학생들의 사고를 확장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발문이 '열린 발문'이다. 



발문의 성격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발문이란 거, 그 자체를 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일대일 상황이 아닌 곳에서 대화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외침들'이다. 특히, 이러한 어려움은 초임교사에게 가중되는데 그 원인을 몇 가지로 추려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학생들이 떠든다. 둘째, 학생들의 반응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셋째, 학생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위의 이유 말고도 선생님이 말을 하기 어려운 이유들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 경험상으로는 위 세 가지 이유가 교사로서 말하기 어려운, 제대로 된 수업을 이끌어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요인들이다.   



예전의 선생님들, 그러니까 내가 초중고 대학교를 다녔을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선생님들은 사실 마이크를 사용할 필요가 딱히 없었다. 그 시절 선생님들에게는 '힘'이 있었다. 어떤 상징적 의미의 힘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물리적인 힘이다. 완력을 사용, 정도가 아니라 상용하는 선생님이 계셨고, 이 같은 완력에 참맛(?)을 아는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침묵했어야 했다. 그러므로 교사의 목소리는 작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운동장에서의 수업이나 운동회와 같은 행사만 아니라면, 마이크로 진행되는 수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20여 년 후, 2022년의 교실은 20여 년 전과는 사뭇 다르다. 교실에서 교사에게 교육자로서 갖는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인권마저 위협받고 있다. 교사에 대한 폭력이나 폭언, 그리고 수업 방해나 거부 등의 교육권 방해는 과거에도 있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일부였고, 기사감도 되지 못했다. 왜냐면 뼈도 못 추렸을 테니까. 혹은 퇴학을 당했을 테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실제로 목격하고 느꼈다. 학생 귀청이 나가게 폭행한 교사는 그 어떤 징계도 받지 않았지만, 교사를 대걸레 자루로 위협한 학생은 퇴학당했다. 그런 시대였고, 그게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난 뭔가 이상한 낌새 정도는 느꼈던 것 같다.



다시 2022년, 이제 교사들은 마이크를 상용한다. 그것이 어떤 무기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결코 무기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외부화된 신체의 일부다. 마이크가 없으면, 교사들의 목소리를 증폭할 기계장치마저 없으면 수업 진행이 어려워진 것이다.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다. 사람을 상하로 나누고,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 타인보다 위에 있다고 느끼는 자로 하여금 이유 불문하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폭력적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권위주의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권위는 살려야 한다. 전통적으로 유지되었던 도덕적, 사회적 권위를 잃은 교사들이 개개인으로서 설자리마저 잃게 만들면 안 된다. 



어떤 반에서 수업을 하고 나왔다. 그 반에는 이런 팻말이 걸려있다.



난 소중해, 딱 너만큼


난 특별해, 딱 너만큼



교사와 학생, 모두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서, 교실에서 만나야 한다.



마이크나 마스크 같은 매개 없이,


나라는 온전한 자아를 갖고도 존중받을 수 있을 때 건강한 교실, 건강한 학교,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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