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아 봐, 좋은 거 줄게

격한 감정에서 순간적으로 나를 차단하는 방법

by 서모니카

말했다시피, 내가 명상을 처음 맛본 계기는 어처구니없게도 ‘폭발 직전의 분노’를 막기 위해서였다.
속으로 1부터 10까지 세면 진정된다는 말이 문득 떠올라, 그대로 따라 했더니 진짜로 마음이 가라앉은 것이다.
뒤돌아보면 그게 나의 ‘명상 체험판’이었다. 정식 버전은 아직 다운로드조차 안 한 상태에서, 무료 맛보기 이벤트만 슬쩍 누려본 셈이다.


그런데 그 ‘체험판’이 꽤 괜찮았다.
상대의 모욕적인 말은 여전히 귓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숫자를 세는 동안 만큼은 나만의 작은 방에 들어간 것 같았다.

눈앞의 풍경이 뿌옇게 흐려지고, 귀에 꽂히던 소리도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리던 순간.
내가 만든 조악한 ‘뇌 속 방음부스’ 속에서 잠깐의 평화를 맛봤던 것이다.

이 경험은 시간이 지나 내 방식대로 발전했다. 나는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니, 이걸 ‘눈 감기 연습’이라 부르기로 했다.
말 그대로, 순간적으로 내 앞의 현실을 차단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행위다.
물론 길 한복판에서 진짜로 눈을 감으면 사고 난다. 내가 말하는 건 물리적으로 눈꺼풀을 내리는 게 아니라, 뇌 속 초점을 꺼버리는 행동이다.
스위치를 탁 내려 불을 꺼버리듯, 눈앞의 풍경을 ‘보지 않는 쪽’으로 돌리는 기술.


이건 전혀 새로운 발상이 아니다. 사실 동양 철학자들이 오래전부터 비슷한 내용을 강조했다.
공자는 ‘군자라면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군자유구사)’를 꼽았다. 그 중에 ‘화가 나면 그에 따를 어려움을 생각하라’는 내용이 있다. 즉, 순간의 화를 절제하지 못했을 때 생길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고 그 화를 자제하라는 뜻이다.

내 식으로 번역하면, “괜히 욱했다가 흑역사 만들지 말고, 일단 한 턴만이라도 참아라” 정도.


맹자 역시 ‘호연지기’라는 개념을 말했다. 크고 강하고 당당한 기운을 일컫는다. 이런 기운은 순간의 분노나 슬픔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호연지기 같은 거창한 단어보다, 나는 ‘눈 감기 연습’이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이래서 철학자는 못 된 모양이다.)
왜냐면 내 호연지기는 그렇게 장엄하지 않거든. 직장 상사가, 혹은 고객사 담당자가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해올 때, 나는 그저 모니터 화면에서 일부러 초점을 잃은 채 가만히 숨만 고른다.
겉으로는 얌전히 메모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숫자 하나, 둘 세고 있다.
그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그게 진짜 ‘말도 안 되는 요청’이었는지, 그동안 쌓인 감정이 괜히 그 요청 하나에 터져 예민하게 반응한 건지 스스로 분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머쓱하게도, 후자인 경우가 꽤 많다.

만약 내가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상사나, 거래처 담당자에게 불쑥 화를 내버렸다면? 그 뒷수습은 상상만 해도 피곤하고 끔찍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눈 감기 연습은 도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을 피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잠깐 차단하는 거다.
스마트폰이 먹통 될 때 ‘재부팅’ 하듯, 인간도 순간적으로 화면을 꺼야 한다.
계속 켜두면 과부하 걸려서 말도 안 되는 오류 메시지가 튀어나오니까.
사실 내가 평소에 쏟아내던 불필요한 말들—후회할 게 분명한 즉흥적 DM, 쓸데없는 대꾸, 참을 수 없는 한숨—이 다 그 오류 메시지였다.


나는 요즘도 자주 ‘눈 감기’를 한다.
친구의 폭주하는 하소연을 듣다가, 인터넷 댓글창에서 기괴한 논리를 접하다가, 혹은 내 안의 자책이 폭풍처럼 몰려올 때.
눈을 잠시 감으면 세상은 잠깐 정지한다. 나를 향해 쏟아지던 말, 소리, 빛이 모두 어두운 스크린 뒤로 물러나고,
그 속에서 나는 잠깐 숨을 고른다.

다시 눈을 뜨면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하다. 나는 이미 한 박자 늦게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한 박자가 내 인생을 몇 번이나 구해냈다.

음악에서도 일부러 박자를 늦추는 기법이 있다.


재즈 연주자들은 종종 뒤로 끌린 듯 한 박자 늦게 음을 넣는데, 이걸 ‘레이드 백(laid-back)’이라 부른다.
리듬을 살짝 밀어내는 그 순간, 연주는 오히려 더 여유롭고 멋있게 들린다.
눈 감기 연습도 똑같다. 세상이라는 빡빡한 드럼 비트에 맞춰 덩달아 날뛰는 대신, 딱 한 박자 늦게 들어가는 것.
그러면 인생도 갑자기 재즈처럼 스윙을 타기 시작한다.


혹시 당신도 요즘 화를 참느라 이를 악물고 사는가?
이를 악물어봤자 잇몸만 상한다.
차라리 눈을 감아보라. 말도 안 되는 누군가의 억지 요구에, 어처구니없는 댓글에, 혹은 스스로의 후회에.
눈을 감는 순간, 세상은 당신의 것이 된다.
감정이 요동쳐 컨트롤할 수 없는데도 ‘감정 끄기’ 버튼을 누르지 않는 건, 바글바글 끓어 넘치는 냄비를 보면서 전원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과 같다.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보자. 냄비 속 요리를 어쩔 건지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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