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하지 말라’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명상을 초기에 나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말은 이거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아무 생각이라니?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머릿 속에선 네온사인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생각하지 말라니, 근데 이건 생각 아닌가? 지금 생각 멈추려는 것도 생각 아냐? 잠깐, 내가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도 생각이지? 으아아아!’
그날 이후 나는 명상보다 ‘경찰과 도둑’ 게임하는 것처럼 ‘생각 검거 게임’을 하느라 더 바빠졌다. 앉아 있는 내내 “너 잡았다 요놈!” 하면서 떠오르는 잡념들을 때려잡았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잡을수록 늘어나는 건 생각이 아니라 자책이었다. “아, 나 명상 잘 못하나 봐…” 하는 불안. 그리고 불안에 대한 불안. 본격적으로 ‘명상’을 하려고 마음 먹고 나니, 명상이란 게 나를 위로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나는 왜 이걸 잘 못하지?’라는 새로운 고민을 키워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심리학 실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온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하얀 코끼리를 떠올리지 마”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바로 하얀 코끼리부터 떠올린다. 머릿속에 코끼리가 행렬을 이루며 걸어 다니는 수준이다. “하지 마”라는 말 자체가 뇌를 ‘그거 해라’ 모드로 바꿔버리는 거다.
비슷한 이야기를 한 운동선수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명한 스키 선수인 사이먼 사이넥은 이렇게 말했다. 스키 선수들에게 “나무를 피해라”라고 말하면 선수들은 오히려 눈앞의 나무만 보게 된다. 나무가 자꾸 눈에 밟히고, 그 나무를 피해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진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그냥 눈길을 따라가라”라고 말하면 어떨까.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무 사이로 뚫린 길로 향하고, 신경은 나무가 아니라 길의 흐름에 맞춰진다. 그 결과 장애물은 애써 피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비껴가게 된다. 그러니까 문제는 ‘생각이 많다’가 아니라,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 자체였던 셈이다.
명상도 똑같았다. “잡념을 없애라”라는 말 때문에 오히려 잡념만 더 또렷해졌다. 반면 “호흡을 따라가자”라고 방향을 바꾸니 잡념이 조금은 덜 스토커처럼 느껴졌다. 억지로 쫓아내려 하지 않고, 그냥 옆을 스쳐가도록 두는 것. 일종의 ‘생각 드라이브 스루’랄까.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면 끝.
나는 이걸 깨닫고 나서야 명상이 조금은 살 만해졌다. 예전에는 잡념이 들면 “아, 또 망했네…”라며 스스로를 혼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아, 생각 하나 지나가네”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온다. 그게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상관없다. 다시 돌아오는 순간, 그 자체가 명상이니까.
이 깨달음은 일상에도 꽤 유용하다.
우린 늘 “걱정하지 마”, “화내지 마”, “초조해하지 마” 같은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런 말은 대체로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걱정은 더 커지고, 화는 더 치밀고, 초조는 배로 불어난다. (진짜다. “초조하지 마”라는 말 자체가 제일 초조하게 만든다니까.)
그래서 시선을 반대로 돌려야 한다. “걱정하지 마”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거 해보자.” “화내지 마” 대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보자.” “초조하지 마” 대신 “내가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루틴을 찾아보자.” 이런 방식이 훨씬 현실적이다. 말 한마디의 방향 전환이 사고의 흐름까지 바꿔버리는 거다.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 하나.
생각이 많다는 건 결함이 아니라 자원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흔히 우리는 “나 왜 이렇게 생각이 많지, 피곤해…”라며 자책하지만, 사실 생각이 많다는 건 그만큼 예민하고, 세상을 깊게 느낀다는 증거다. 친구의 표정 하나에도 변화가 보이고, 뉴스 한 줄에도 의미를 곱씹을 수 있다. 그건 오히려 감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명상은 그 생각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나무가 빽빽한 숲 속에서 길을 찾는 연습에 가깝다. 오히려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이야 말로 더 아득하지 않은가. ‘길’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조차 없으니까. 차라리 빽빽한 나무 사이에서 길을 찾는 게 수월하다.
나는 가끔 내 머릿속을 거대한 도서관에 비유하곤 한다. 책장은 빽빽하고, 수많은 책들이 제멋대로 꽂혀 있다. 잡념은 그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책과 같다. 어떤 건 분명 쓸모 없는 책인데 제목만 그럴싸하고, 어떤 건 무겁고 두꺼워서 꺼내는 순간 허리가 휘청거린다. 예전엔 그런 책들이 나오면 짜증부터 났다. “아, 또 이 책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냥 잠깐 펼쳐보고, 괜찮으면 이어서 읽고, 필요 없으면 다시 꽂아둔다. 그게 전부다.
결국 명상은 나를 통제하는 훈련이 아니라, 나를 허용하는 연습이다. 오늘도 잡념이 밀려오면 그냥 지나가게 두면 된다. 가끔은 “와 오늘 잡념 풍년이네?” 하고 웃을 수도 있다. 그 순간조차 명상의 일부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누가 “아무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속으로 이렇게 되받아친다.
“생각이 많아도 괜찮아. 나는 지금 숲에 있는 거야. 숲에 나무가 많은 건 당연해. 나는 그냥 숲 속에서 길을 찾기만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