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말 너무하잖아. 이건 또 무슨 뜻이지?'
이민진 작가가 쓴 소설책인 파친코 영문본의 첫 번째 챕터가 끝나기도 전에 책 옆에 켜 놓은 노트북의 네이버 영어사전으로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산 지가 벌써 20년이고 수려한 영어능력이 필수적인 변호사들과 함께 일해 온 게 십여 년이 넘는데 아직도 소설책 한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가 상당하다. 이럴 수가...나, 헛똑똑이었나.
며칠 전 필요한 책이 있어 동네 도서관을 찾았고, 서가 옆 게시판을 둘러보다가 8월 20일에 독서 토론회가 있다는 공고문을 발견했다. 이 달의 책은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란다. 재일 한국인 이야기를 담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책이어서 반가웠다. 애플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는 파친코 스토리를 대략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관심이 갔고, 때마침 도서관 서가에 파친코 책이 꽃혀 있길래 냉큼 대여해 왔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던져 놓은 지 서너 일째.
빌려놓고 안 읽은 채 그대로 반납하겠다 싶은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오기가 생긴다. 앞으로 2주나 남았는데 못할 게 뭐 있지?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책이지만 하루에 50 페이지씩(만?) 읽으면 10일 안에 충분히 다 읽고 독서 토론회까지 여유있게 참석할 수 있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첫 번째 챕터인 일곱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에 걸려 여러 번 넘어졌다.
낯선 영단어를 일일이 찾아보려니 귀찮고 그냥 넘어가자니 작가가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주고자 한 또렷한 이미지를 놓치게 될 것 같아 아쉬웠다. 전자책이라면 모르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지긋이 눌러주는 동작 하나로 단어 뜻을 팝업창에 뜨게 할 수 있는데 이건 종이책이다 보니 영락없이 온라인 영한사전의 힘을 빌려 일일이 스펠링을 써넣어야 한다.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은 단어를 찾아가면 읽기로 결정. 그동안 시간이 없고 귀찮다는 핑계로 얼마나 많은 배움과 공감의 기회를 놓쳐 왔는데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은 오늘까지 그 습관을 유지해서는 안되지 라는 생각에.
어쩌면 내게 낯선 단어들은 소설책의 줄거리만 알고자 한다면 그냥 넘어가도 무방한 것일 수도 있다. 장면의 생생한 묘사와 인물의 섬세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부사와 형용사가 모르는 단어의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복잡다단한 면모와 세밀한 결을 느끼고자 한다면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골랐을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따라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 책 뿐이랴. 살면서 나와 마주친 인연들, 나에게 주어진 기회들, 내가 누려 온 환경들. 시간을 들여 자세히 바라보고 공들여 이해하려 했다면 그 인연과 기회와 환경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나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지 않았을까. 그 발견의 기회와 성장의 계기를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졌다.
약 2주 앞으로 다가 온 동네 도서관에서의 파친코 독서 토론회. 과연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 지,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외국인들은 같은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품고 감정을 느꼈을지, 그리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소설책을 손에서 놓고 지냈던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과 읽고 난 뒤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기대하며 오늘치의 50페이지에 도전해 본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써 놓았으니 혼자 계획하고 포기한 뒤 자책하는 일은 없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