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환자를 옮기기나 해
한 번이라도 병원에 입원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모든 치료가 병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말이죠. 의료진이 세운 치료 계획에 따라 각양각색의 검사실에 가기도 하고, 수술실이나 재활 치료를 받으러 이동하기도 하고, 중증도가 낮은 병동에서 더 높은 병동으로 옮겨가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미국의 병원에서는 환자를 누가 어떻게 이송하는 걸까요? 오늘은 그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병원에는 이송 사원님이 계셨습니다. 이송 사원님들은 환자를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의료진의 요청에 따라 옮기시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아쉽게도 움직여야 할 환자가 많은 반면 이송 사원님의 워낙 수가 적고, 주간에만 근무하시는 경우가 많다 보니 결국 간호사가 환자를 이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매우 빈번히 발생합니다.
미국의 병원들은 어떨까요? 더 나을 것 같나요? 기관별로 상이할 수 있으나 제가 있던 곳은 모든 측면에서 늘 인력이 부족한 곳이었기 때문에 (^^) 만만치 않게 열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환자의 중증도별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의식이 있고, 상태가 안정적인 환자
환자가 혼자 거동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혼자 잘 걸어 다니는 환자라도 병실 밖을 나오면 무조건 휠체어에 태워 이동을 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표면적으로는 안전상의 이유를 강조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환자가 병실에서 검사실 등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 넘어져 (= 낙상) 발생하는 사고의 책임이 무조건 병원에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송사원님을 호출했을 때 바로 오실 수 있으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무척 희박합니다. 따라서 이동이 지연되면 (금식이 필요한 검사 같은 경우) 환자가 불평할 뿐 아니라 검사가 취소되는 것과 같은 불상사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간호사가 환자를 휠체어에 태워 손수 모셔다 드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간호 보조 격인 patient care assistant (PCA) 혹은 patient care technician (PCT)가 그 업무를 대신할 수는 있으나 (다들 일이 늘어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바쁘다며 거절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책임은 결국 간호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기 마련이니 간호사가 해결하는 수밖에 없죠.
환자가 독립적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할지라도 nasal cannula나 O2 mask 등을 통해 산소 공급이 필요하거나 continuous cardiac monitoring이 필요한 경우는 휠체어에 산소통, cardiac monitor와 같은 의료기기를 동반해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간호사가 동반 혹은 이송해야 합니다. 이동 중에 발생할 응급 상황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그 상황에 대한 대처가 가능한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이 경우, 간호사와 상의 후 의사가 단독으로 환자를 이송해도 됩니다. 실제로 저와 친하게 지냈던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제가 바쁠 때 많이 도와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서로 돕는 관계, 크으, 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기까진 원내 이송이니 이해할만하죠. 조금 놀라실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간호사는 환자가 퇴원할 때에도 (가족이 와서 직접 모셔가지 않는 이상) 환자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밖에 대기 중인 택시에 고이 앉혀드린 뒤, 잘 가시는지 보고 돌아와야 합니다. 다시 병동으로 돌아와서는 기록을 남겨야죠. 안 그러면 이 모든 고생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간호 = 기록... 아시죠?
"1635pm, 병실에서부터 간호사가 휠체어로 환자를 안전하게 이송하여 병원 밖 택시에 안전히 옮겨드리고 택시가 출발하는 것을 확인함, 환자 안정적인 상태로 퇴원함."
... 여기까지 난이도 下 였습니다.
2. Mechanical ventilator (인공호흡기) + 온갖 sedatives와 같은 multiple IV drips가 들어가는 환자가 CT/MRI와 같은 검사 때문에 이동이 필요한 경우
(제가 써놨지만 상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상당과 노력과 인력과 시간이 수반되는 업무이지만 어쨌거나 여러 번 해낸 일이니 미국에서 간호사 커리어를 준비하시는 여러분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실 수 있도록 잘 작성해 보겠습니다.)
자, 일단 환자를 이동하기 전 세팅을 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의 환자라면 지속적 모니터링이 필수이기 때문에 portable EKG 모니터를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 위에 올려두고 환자 몸에 부착된 EKG lead와 전부 연결합니다. 현재 주입되는 IV drip을 하나씩 살펴보고 검사실에 다녀올 수 있을 만큼 앞으로 최소 1-2시간 정도 충분한 양이 남아있는지 확인합니다. 아니라면 새것으로 교체해 두는 게 안전하겠죠. IV를 확인하는 김에 환자 몸에 있는 IV access도 다 괜찮은지 확인합니다. 오래되었거나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려운 경우, 새로 하나 잡읍시다. 검사실에 가는 경우 조영제를 쓸 가능성이 높으니 18G로 잡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억제대가 있는 경우, 올바르게 적용되었는지 다시 확인합니다. 병동에 있는 emergency kit 상자도 가져다가 환자의 침대 밑에 실어놓습니다. (Emergency kit은 e-cart를 최소화시켜 놓은 것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Epi 등 바로 사용 가능한 응급 약물이 들어있습니다.)
환자가 준비되었다면 이제 사람을 불러 모아야 합니다. 혼자서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 인공호흡기, 그리고 IV pumps 이 모든 것을 옮기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1) MD, 최소 레지던트 2년 차 이상 ★★★
병원마다 규정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제가 있던 병원은 무조건 레지던트 2년 차 이상이 동반해야 했습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가 실수로 대만에서 온 레지던트 1년 차와 함께 환자를 검사실로 데려갔다가 병동으로 돌아온 뒤 레지던트 4년 차와 다른 한국인 간호사 선생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하게 병동이 떠나가도록 혼쭐이 났던 기억이 나네요. 그분들의 말에 따르면, "레지던트 1년 차가 뭘 안다고 걔를 데려가! 환자한테 응급 발생했을 때 너랑 레지던트 1년 차 둘이서 뭘 할 수 있는데!"라고 하셨습니다. 그 대만 레지던트는 이미 대만에서 의사로서 경력을 1년을 채우고 온 사람이라 실제로는 2년 차였지만, 미국에선 1년 차였기에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없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유일하게 울었던 날이었습니다. 엉엉ㅠㅠ) 여러분들은 꼭 원내 규정을 사전에 잘 확인하셔서 이런 상황을 겪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2) Respiratory therapist
한국에선 간호사가 일당백이기 때문에 인공호흡기도 간호사가 담당하지만, 미국엔 호흡기 치료만 집중해서 관리하는 Respiratory therapist (RT) 직무가 따로 있습니다. 이분들은 인공호흡기, 네뷸라이저 치료, O2 관리 등등 호흡기 관련 치료를 맡아서 수행합니다. 그렇기에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의 이동의 경우, 이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동하는 동안 이분들이 인공호흡기를 옮겨주시며 필요시 의사에 오더에 따라 조작해주시기도 합니다. (원내 여느 직원과 다를 바 없이 친하게 지낼수록 좋습니다!)
3) 이송 사원
환자의 침대, 인공호흡기 등의 기기는 꽤 무겁습니다. 따라서 손이 많을수록 이송이 수월하겠죠? 상황이 허락한다면 이송 사원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강력 추천합니다. 사람 한 명 더 있으면 훨씬 안전히 환자를 옮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송 사원님이 바쁘셔서 오실 수 없다면, 이송 사원님 없이 의사, 간호사, RT 이렇게 셋이서 환자를 옮겨도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환자를 11시까지 검사실로 옮겨야 하는데 10분 전에 의사나 RT에게 오라고 하면, 그들도 나름의 일과가 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하기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늦어도 1-2시간 전에 미리 상황에 대해 안내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이 정도는 직장인의 흔한 매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다모이면 환자의 침대와 여러 기기들을 함께 끌고 원내를 활보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그 과정에서 침대 바퀴에 발을 찧은 적은 많은데요, 상당한 고통을 경험하실 수 있으니 근무화는 꼭 발이 잘 보호되고 편한 걸로 잘 골라서 신으시길 권합니다. 다치면 산재가 되냐고요? 해당 인물의 고용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일단 안 다치고 보는 게 상책입니다.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중 부상(?)을 입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여담으로, 환자를 돌보는 데 있어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RT, 간호조무사, 영양사, 사회복지사 등등 모든 팀원이 그 책임을 분담해야 할 것 같지만 어째서인지 간호사는 늘 부탁하는 입장인 듯합니다. 그걸 당연히 여기며 "안되는데? 나 바쁜데? 다른 사람 찾아봐." 사람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정해진 검사를 수행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안 좋은 상황의 모든 책임은 결국 간호사에게 돌아오기에, 저는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 얼굴로 질척거리며 부탁을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간호사로서 간호 외에 많은 것들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환자로부터 병원식이 맛없다는 폭언부터 시작해서, 왜 원하는 약을 주지 않는지, 랩 샘플을 받은 지 오래됐는데 검사실로 내려보낼 사람이 없어서 직접 가야 한다던지 등등을 포함해서 '내가 이러려고 간호사가 되었나'하는 자괴감이 드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간호사들이 결국 더욱 안전하고 존중받는 일터를 찾아 대학원에 진학해서 NP가 되거나 뛰어다닐 일 없는 의원급으로 옮겨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간호에 임하는 세계 모든 곳의 간호사들이 전문 의료인으로서 존중받는 그날을 꿈꿔봅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https://www.medipulse.in/blog/2022/3/7/how-the-intensive-care-unit-works-as-a-saviour-of-million-of-li 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