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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Feb 06. 2023

아홉 살 인생, 아홉 살 여행

나의 가장 가까운 타인의 여행은

오늘도 고된 하루 지나는
무거운 네 어깨 위에
해줄 수 있는 말은 적지만
너를 위해 기도한다


- 난 이런 노래를 들으면 괜히 반항하고 싶더라? 


루사카에 도착한 날, J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톡 튀어나온 나옹의 시니컬한 말에 어른들은 폭소했다.  J는 웃다가, 어, 그렇구나 나옹, 미안하다, 하며 어정쩡 트랙을 돌렸다. 아니 그게 도대체 어떤 마음이야? 하니, 몰라,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는 거야.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배시시 웃는 삼춘기 꼬맹이. 저 고운 노래가 너의 어디를 건드린 것이냐.


한편으론 즉각 드러낸 본색(?)에 마음이 놓인다. 오랜만에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건만 고래(J)와 기린(J)의 품이 꼬맹이에게 여전히 '안'이로구나. 아이는 3학년에 새로운 동네로 전학 후, 친구를 만드는 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은 터였다. 나 또한 요새 아이들이 친구가 되는 방식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도 처음, '밖'에서의 아이는 집에서 보여 준 적 없고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얼얼하게 직시했다.


어느 날부턴가, 아이가 잠비아에 가고 싶다 했다. 잠비아라기보단 '율이네 집'에 다녀오고 싶다는 거였다. 옆 동네 마실하듯 아프리카에 다닐 형편은 아니지만 코로나로 오래 쌓이기만 한 항공 마일리지와 휴가가 있었고, 아이의 한 해 살이를 돌아보면 들어주고 싶은 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머뭇하는 마음도 들었다. 나옹과 율은 공동육아 시절 또래 중 둘 밖에 없는 동성 친구라 늘 붙어있으면서도, 워낙 성향이 다르고 다툼이 잦았다. 교사들에게 터전 밖에서의 만남이라도 자제하라는 충고까지 듣던 아이들이다. 나조차도 '둘밖에 없어 잘 놀지만 학교 가면 각자 맞는 친구 만나 멀어질 아이들'이라 자주 말했었다. 조금 컸지만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과연 잘 지내려나?


- 우리가 사실 네다섯 살 땐 서로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 맞아, 엄청 싸웠어. 근데 엄마가 친하니 싸우는 거지 안 친하면 안 싸운다고 했어.


만 아홉 살들이 네댓 살 왕년을 회상하는 게 웃겨 죽겠다. 기억이 나냐? 했더니, 그럼 기억나지. 그리고 우리 졸업하고 서로 더 많이 좋아해, 보고 싶어졌어, 한다.


각각 다른 환경에서 친구 사귀느라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한 날들을 풀듯, 두 녀석은 보름 내내 밤낮으로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아이는 서슴없이 그 집 식구들 틈에서 잤다. 끊임없이 까불고 깔깔깔깔 웃었다. 투닥댈 기미가 보이다가도 언니인 솔을 중심으로 곧 조율이 됐다. 아무래도 '어차피 멀어질 아이들'이라는 나의 예상은 틀린 것 같다.


잠비아에서의 아이 얼굴을 보며, 아이를 아무리 아낀 들 결국 나는 저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 길이 없는 타인임을 실감한다. 솔 율과의 시간이 행복해서인지, 잠비아와 아이의 케미가 맞아서인지, 아이는 많이 웃기도 했지만 매 순간 어디 한 군데 막힌 데 없는 표정을 했다. 한국에서 사진을 보던 아이 아빠는 ‘얼굴이 달라졌다'고 했다. 틈만 나면 집 앞 공터를 뛰고 축구공을 쫓으며 보름 만에 몸이 눈에 띄게 탄탄해졌다. 남쪽으로의 장거리 여행 중 모두가 한 번씩 앓는 중에도 혼자 설사 한 번 없이 멀쩡하고 왕성했다. 급기야,


- 나 집에 안 갈래 엄마. 루사카에 더 있다가 갈게.


집으로 떠나기 전날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다. 율도 제발 나옹과 며칠만 더 같이 있고 싶단다. J 역시 내게만 살짝, 심지어 아이들이 졸랐다는 걸 모르는 채로, 나옹을 두고 가면 어떻겠냐 묻는다. 남편마저, 데리고 오면 좋겠지만 정 더 있고 싶어 하면 나 혼자 오란다. 그 생각이 가능한 건, 우리 뒤를 이어 터전의 다른 또래 두 집이 잠비아에 올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 집들 갈 때 같이 보내면 되지 뭐가 문제야?라는 생각을 애도 어른도 당연하게 해 보는, 아.. 공동육아란 무엇인가!


- 네가 정말 원하면 비행 편 바꿔줄 수 있어. 엄마 생각에도 너 여기서 보름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집에 오는 길도 생각해야 해. 다솜 봄봄이 있어도 이미 일행이 많아서 엄마랑 오듯이 누가 널 살펴주긴 어려워. 스스로 잘 돌보면서 올 수 있겠어?


생각할 시간을 달라던 아이는 곧 풀 죽은 목소리로 엄마와 집에 가겠다 한다. 아이가 셈에 넣지 못했을 수를 던진 것이긴 했다. 오는 길에 비행기는 아디스아바바 착륙 전 상공에서 꽤 오래 하늘을 빙빙 돌았고, 아이는 호되게 멀미를 하고 휠체어 신세를 지고 환승한 터였다. 그럼에도 '엄마 없이 돌아오는 길'을 각오하고 남겠다면..? 아직은, 그 엄두가 나진 않나 보다.


정작 돌아오는 길은 몹시 수월했다. 루사카에서 아디스아바바까지 '순식간이었다'던 아이는, 갈아탄 서울행 비행기에서는 이륙과 동시에 잠들어 여덟 시간을 내리 자고, 기내식과 영화 한 편을 앗쌀히 끝내고 착륙을 준비했다. 멀미도 두려워하고 식감에 따라 음식도 몹시 가리는 녀석이, 초베에서 막 잡은 버펄로로 요리한 듯 누린내만 신선한 기내식은 뚝딱 해치우고 질이 좋은 쿠키는 손사래친다. 알다가도 모를 녀석.


- 우리 나옹 정말 예쁘네. 언제 이렇게 컸나.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를 찬찬히 본다. 23개월 차에, 아이는 현지에도 아가들 먹을 게 있고 안 먹음 한두끼 굶어도 된다며 아무것도 안 챙긴 부모와 첫 여행을 했다. 다행히 두 돌 아기는 낯선 향신료를 포함해 무엇도 마다하지 않고 잘 먹고 잘 놀았다. 지금은? 어림없다. 먹어보고 싫음 더 안 먹어도 돼, 하지만 아예 입에도 안 대는 건 안 돼- 하면, 아이는 새로운 음식을 손톱만큼 입에 넣으며 대꾸한다. 강요하지 마!


예나 지금이나, 여행이 아이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길, 아이가 여행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그러나 내게서 나왔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 아이는 한 여정 속에서도 슬슬 자신의 보폭과 시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여행은 아이를 먹이는 것과 같아서, 아이가 뭘 먹었는지 일일이 기억하길 바라지 않듯 여행도 아이의 체질로 차곡차곡 쌓이길 바란다. 그러나 아이는 나와는 다른 사람, 아이의 기억도 체질도 종내 나의 바람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아이와의 찰나는 그저 나를 위해 깊고 넓게 만끽하기로. 이 속도라면 우리를 따라나서지 않는 순간도 곧, 품을 떠나는 순간도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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