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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Feb 22. 2023

야간 비행

어느 사잇 시간

잠비아에선 늘 일찍 눈을 떴다. 긴 여행이 아니니 굳이 시차에 완벽히 적응하지 않고 새벽 네 시, 다섯시, 눈이 떠지는대로 일어났다. 사람의 활기가 섞이기 전 부드러운 바람, 이슬이 섞인 풀냄새, 뒷마당 큰 나무에서 망고가 떨어지는 소리, 서서히 뜨는 해가 나뭇가지 사이로 잘게 부서져 발 끝에 닿는 빛. 하늘이 아름다운 그 곳의 아침이 깨어나는 순간에 머무는 호사를 누렸다.  


호사스럽다 느끼는 건, 그런 순간이 한국에선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한국 밖으로만 나오면, 포털, 뉴스, 쇼핑, SNS..  그 모든 망이 툭, 끊어지듯 내게서 힘을 잃는다. 노력하지 않아도 열게 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감정들의 장력도 약해진다. 그러면 머리가 비워지고 다른 풍경과 다른 생각이 스며든다. 어쩌면 나는 이런 거리를 반복적으로 확보하려 여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J부부와, 여행의 목적지로 떠나는 길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중 무엇이 더 짧게 느껴지는지 얘기한 적이 있었다. J는 여행을 떠나는 길은 설레서 금방이지만 돌아오는 길은 피로가 쌓여 길게 느껴진다 했다.


나는, 늘 집을 떠나기 직전까지 일을 하거나 벼락치기로 짐을 싸고 숨이 차게 길을 나선다. 떠나는 마음도 자주 복잡해서, 곤죽이 된 몸과 마음을 내던지듯 비행기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자주 아프기까지 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대체로 한껏 가벼워지고 고양된 상태다. 떠나는 나와 돌아오는 나는 다른 사람이듯, 충만한 여행 이후 나의 세계는 이전과 아주 미묘히 달라져 있다. 그리고 그 사이, 그 두 세계 사이의 버퍼가 되어 주는 비행의 시간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절반쯤 빈 채 출발했다.  밤이 되자, 빈 좌석들은 누워 자는 승객들로 빠짐없이 채워졌다. 승객들을 신선하게 운반하는 거대한 냉장고처럼 냉기를 뿜는 비행기도, 이 정도 규모의 인간들이 수면 중 내뿜는 체취를 이기지는 못한다.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 냄새가 난다. 썩 좋지는 않지만, 어쩐지 따뜻하고 안심이 되는 인간들의 냄새. 안락한 고립감을 주는 공기.


내 앞의 스크린에선 내내 스카이쇼(Sky show)가 오토플레이로 돌아간다. 조악한 3D 창공 위로 비행기가 난다. 바레인, 카불, 노보시비리스크 같은, 가 보지 않은 도시들의 이름에 다시 설렌다. 피부같은 지표의 군데군데 핏줄처럼 보이는 강줄기들도 신비롭다. 시간과 공간이 묶인 이 기내의 작은 자리에 고립되어 쓰다 졸다 하다 보면, 내가 길을 다 알든 모르든 나를 데려다 주는 이 비행기처럼 삶이 어쨋든 어딘가로는 향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저 스카이쇼만큼도 인생을 조감할 수 없는 내게, 네가 지나는 데가 여기쯤이라고, 땅에 붙어 있을 땐 잘 모르지만 이러한 세계를 지나고 있다고, 그러니 앞으로도 잘 살 수 있고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용기를 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장거리를 이코노미로 다니기 힘들다는 말이 실감난다. 출장도 아닌 여행을 비즈니스로 타는 일은 평생 없을 것 같고, 지난 번엔 꾸역꾸역 기내식을 다 먹고 급체해 잠시 의식을 잃는 사태까지 겪었다. 기후와 생태 위기 시대에 탄소를 뿜어내며 여행하는 건 상식에마저 어긋나는 시대가 곧 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도 한동안은, 옛 시대의 사람답게, 나는 비행기를 타고마는 이 여행을 멈추기 어려울 것 같다.


다시 한 절을 마쳤다.

잠시, 마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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