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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나 Oct 15. 2024

오늘은 내가 바로 요리사!

음미하다 3

 어릴 적 우리 집은 근방에서 가장 멋진 신식 양옥집이었다. 흙바닥에 아궁이만 있는 이웃집들과 달리 매꼬롬한 시멘트 바닥에 최신식 연탄과 석유곤로, 아궁이와 가마솥이 함께 있던 부엌은 특히나 ‘최신식’이 무엇인지 유감없이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 부엌에서 나의 첫 요리가 탄생했다. 


 일곱 살 어느 봄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밥을 지었다. 심청이도 울고 갈 효녀라도 되고 싶었는지, 나는 농사일을 마치고 집에 오실 부모님을 위해 밥을 지었다. 평소 어머니의 밥 하는 모습을 잘 지켜봤기에 자신은 있었다. 보고 배우는 것의 놀라운 힘을 내가 증명하려 한 순간이었다. 쌀을 씻어 가마솥에 넣고 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어머니처럼 손을 가마솥에 넣었다 뺐다. 손등으로 밥물의 양을 가늠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손을 넣었다 빼는 자체가 밥 짓기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마솥은 엄청난 크기만큼이나, 뚜껑도 크고 무거워서, 어린 내가 들기에는 힘에 부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가마솥에 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구나 싶을 정도다. 


 부엌 건너편에 있는 창고에서 지푸라기를 한 움큼씩 집어 와, 아궁이에 있는 힘껏 집어넣고, 네모난 사각 통에 열 맞춰 있던 성냥개비를 한 개 들었다. 화약이 묻은 동그란 성냥 머리를 빨간 성냥 통에 대고 있는 힘껏 그었다. 성냥 머리는 ‘치이익’ 소리를 내며, 노랗고 파랗고 빨간 불꽃을 튀기며 타올랐다. 불이 붙은 성냥을 지푸라기 가득한 아궁이에 집어던지니 지푸라기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잘도 탔다. 불꽃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부지깽이로 지푸라기를 최대한 아궁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아궁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지푸라기를 확인하고 나서 다시 창고로 갔다. 


 처음 불을 살릴 때는 지푸라기를 쓰고, 다음부터는 솔가리(말린 소나무 잎)를 사용하시던 어머니처럼 솔가리를 집어 왔다. 어느새 불꽃이 사그라지는 아궁이 안으로 솔가리를 밀어 놓고, 또다시 창고로 향했다. 이마에서 땀이 날 만큼 꽤 여러 번 창고와 부엌을 왕복했다. 드디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가마솥뚜껑 사이로 하얀 김이 피식피식 퍼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께서 하시던 대로 아궁이에 집어넣는 솔가리의 양을 줄였다. 불꽃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궁이 앞에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아궁이를 쳐다보았다. 벌겋고 노란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마법사들이 마법 지팡이로 치열하게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가, 요정들이 모여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아궁이의 불이 다 시들고 나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아직 뜨끈한 온기가 가득 있던 부뚜막으로 올라가 행주로 가마솥 손잡이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가마솥뚜껑을 내 쪽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하얀 김이 뭉게구름처럼 한꺼번에 확 올라오면서 온 얼굴을 감쌌고, 고소한 밥의 풍미가 콧속을 가득 채웠다. 정말 밥이 되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내가 만든 밥을 보고 놀랄 부모님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밥을 큰 냄비에 옮겨 담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깐밥도 만들어졌다. 그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덤이었다. 역시나 깐밥은 바삭바삭하고 고소했다. 


 아궁이와 가마솥 주변 정리도 최대한 깔끔하게 해 두었다. 밥을 푸다가 흘린 밥풀때기도 남김없이 손으로 집어 먹어가며 청소를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할 만큼 완벽한 뒷정리였다. 하지만 그건 나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어머니는 그날 난장판이 된 부엌을 보고 도둑이 든 줄 아셨다고 했다. 


 내가 해놓은 밥과 어지럽혀진 부엌을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서 계시던 어머니 모습을 보고, 나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자신했다. 나에게는 어머니의 그 모습이 기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나에게 도대체 어떻게 불을 붙였는지, 지푸라기와 솔가리를 어떻게 날랐는지 묻고 또 물으셨다. 요즘도 가끔 물어보신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셨던 것이다. 지은 지 일 년도 안 된 새집이 잿더미가 되었을 수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나도 아찔해진다. 


 얼마 전 우연히 들른 가게에서 조그만 성냥을 팔길래 반가운 마음에 하나 샀다. 아무 곳에도 쓸 일이 없지만, 그냥 내 어린 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망설임 없이 샀다. 집에 장식품으로 올려놓았다. 성냥이 생필품이 아닌 장식품이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냥은 우리에게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냥이라는 단어조차 무척이나 생소하게 느껴진다. 요즘 아이들에게 성냥은 뗀석기나 간석기처럼 고대 유물로 느껴질 것이다. 아마 성냥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듣지 못했거나, 실물을 보지 못한 경우도 꽤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성냥이 사라진 것처럼,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곧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곧 잊힐 것이다. 세상은 변해가는 게 맞지만, 우리 삶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적응하기 무섭게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온다. 적응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다. 변화되는 속도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것만이 정답인 듯, 어제를 잊는다. 


 출퇴근길 인파에 휩쓸려, 의도와는 상관없이 전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내 발처럼 불안하다. 속도에 휩쓸려,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잃어버리고 있다. 그러다 ‘나’도 ‘나’를 그렇게 잊어버리고, 잃어버릴까 걱정이 된다. 여기가 어딘지, 왜 여기에 있는지, 한 번쯤은 둘러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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