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을 그만두고 하버드로 갑니다.
1.
오늘 사무소 대표에게 사직서를 냈습니다.
2.
9년간 유니세프를 통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고 일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3.
2013년 네팔에 와이프와 단둘이 정착해서 3년을 거치며 첫째 아들을 만들었고, 2015년엔 5개월 신생아와 함께 네팔 대지진을 겪기도 했습니다. 네팔어도 배웠고 네팔을 더 알고자 노력했습니다. 팀도 너무 잘 만나서 닥치는 대로 일을 배웠고, 3년간 쑥쑥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해볼 만하겠다는 자신감을 얻고 2016년 유니세프 가나 사무소로 잡을 구해서 이동했습니다.
4.
가나에선 둘째를 가졌습니다. 처음 살아보는 아프리카였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서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지만, 역설적으로 아프리카에서의 삶이 저희에겐 그렇게 좋았습니다. 이안이한테는 첫 번째로 학교를 간 나라이기도 합니다. 가나 음식을 손으로 먹는 습관은 여전히 이곳에서 이어질 정도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가나에서는 팀장이 되는 경험을 미리 하며 슬슬 매니저로의 역량을 배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프로페셔널로 홀로서기를 하며 자리매김을 한 시간이었습니다.
5.
중간에 유니세프 공채 프로그램인 NETI에도 합격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본부에 가서 2주간 오리엔테이션도 받고 뭔가 엄청난 경쟁을 뚫고 합격한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여기에 낄 수 있구나 하며 몇 년 고생한 자신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 프로그램 덕분에 말레이시아로의 이직도 한결 수월했습니다. 저개발국, 중진국을 거쳐, 이제 선진국 문턱에 선 말레이시아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6.
2018년 말레이시아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팀장을 맡아서 두 개의 팀을 새로 만들고 직원들을 뽑아서 팀을 열심히 키웠습니다. 지난 4년간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의 성취를 넘어 팀의 성취와 성장을 만드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렇게 들어온 팀원들이 이제는 모두 스태프들이 되어서 각자의 역할을 너무나도 잘해주는 걸 보면서 감사함을 느낍니다. 아이들도 학교를 다니고 영어도 한국어도 빠르게 배웠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처음으로 유니세프 fixed term staff 이 되면서 직업의 안정성도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내 가구, 내 피아노, 내 책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매번 중고로 사서 중고로 팔고 다니던 지난 10년이었기에 와이프에게 항상 미안했는데 처음으로 우리 살림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7.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작년 창세기를 읽으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익숙한 하란을 떠나 불모지인 가나안으로 가라는 말씀을 여러 번 읽으면서 확신을 얻었습니다. 내가 가진 안락함과 안정 때문에 떠나기를 주저하는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기에 안정에 매몰되어 다른 곳으로 떠나기 주저하던 저에게 주신 경고와도 같았습니다. 어딘가에 있는 광야로 저를 이끄는 확신이 들었고, 지난 한 해 다른 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고단한 1년 반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야 열매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8.
오늘 사직서를 내며 유니세프와의 뜨거웠던 9년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나름 안정적인 유니세프 직원을 내려놓고 미국에 박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올여름부터 하버드에서 Doctor of Public Health (DrPH)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세부 분야는 social and behavioral science로 지금 하는 일의 연장선상에서 어떻게 행동변화를 통해서 아이들과 청소년의 건강한 삶을 만들 수 있을지 공부하고 실제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시간을 보낼 예정입니다.
9.
석사를 보스턴에서 해서 보스턴이 익숙하지만 신혼 커플로 2년을 보냈던 그곳과 아이 둘을 데리고 다시 돌아갈 그곳의 차이는 큰 것 같습니다. 일단 재정적인 문제도 월급 없이 가족으로 버텨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되고, 좋은 아빠로 공부와 육아를 병행할 수 있을지도 걱정되고, 졸업 후가 벌써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선한 하나님께서 저의 길을 이끌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한 걸음 또 내디딥니다.
10.
사직서를 던진 오늘을 기억하고자 이 글을 남깁니다. 저의 박사학위가 나의 세상적 성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닌 제가 섬기는 개발도상국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더 도움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가는 것임을. 이 사직서의 무게만큼이나 가서 힘들더라도 이 악물고 버텨서 더 좋은 프로가 되어 이쪽 필드에 돌아오기를 다짐해봅니다. 영어에 bittersweet이란 말이 있습니다. 씁쓸하면서 기쁘기도 한 지금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단어죠. 사직서를 던지는 지금 이 순간. 내년, 5년 후, 10년 후 저는 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나이 40에 이런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요. 모든 분들께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