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전염되니까
매일 산책을 하다 보면 때때로 낯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게 된다. 강아지가 예쁘다는 칭찬을 듣거나 무슨 종이냐는 질문을 듣고 대답하다가 잠시 담소를 나눌 때도 있지만, 애초에 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무례한 언사를 듣고 그날 산책을 망칠 때도 있다.
예컨대 이런 말들.
모처럼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넓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던 날, 이동용 가방에 뭉구를 넣어 앞으로 메고 걸어가는데 역 앞 과일 트럭에 앉은 아저씨가
개놈 팔자가 상팔자네. 등치도 큰 놈이 내려서 걸어, 새끼야!
가로수 밑동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팔린 뭉구에게 계속 휘파람을 불던 아저씨가
뭔 개놈의 새끼가 사람을 무시하네? 야! 야! 여기 안 봐?
산책로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아저씨가
개새끼야, 너 주인 말 잘 들어. 안 그러면 굶어 죽어야 돼.
말의 내용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내가 옆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여봐란듯이 큰 소리로 말하고서 능글능글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정말이지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민다.
왜 저러지?
내가 만만해 보이나?
화가 나서 대꾸할 말조차 얼른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와중에도 대꾸했다가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엄습한다. 뭉구를 재촉하며 그 자리를 벗어난 뒤에야 나는 분에 못 이겨 걸음을 멈춘다. 그러면 뭉구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누나, 왜 그래?
왜 기분이 나빠?
아까 저 사람 때문이야?
내가 평소에 뭉구를 관찰하고 상태를 살피는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뭉구도 나를 관찰한다. 다른 사람들과 더 가까이 있을 때는 물론 내 품에 안겨 있을 때에도 나를 올려다보며 누나가 무엇을 하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 살핀다.
내 행동을, 표정을, 감정을 뭉구가 살핀다. 그리고 고스란히 느낀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불안이든 감정의 종류에 관계없이 내 마음 상태가 뭉구에게 전염된다. 내가 즐겁지 않으면 뭉구도 즐겁지 않다. 즐겁게 나선 산책이, 즐거워야 할 산책이 엉망이 된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뭉구에게 불안을 전가하지 않으면서 즐거운 산책을 이어나가려면 내가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까? 열심히 궁리했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고, 현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이 정도뿐이라는 결론이 났다.
무례한 말을 듣는 즉시 단호하게 항의하고, 곧장 돌아서는 것.
지금 그 말씀 불쾌합니다.
하지 마세요.
'에게, 겨우 그거?' 싶을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저 짧은 문장을 입에 올리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
말했다가 얻어맞으면 어떡하지, 내가 아니라 뭉구를 패거나 걷어찬다면, 갑자기 흉기를 꺼내 휘두르기라도 한다면….
몇 초도 안 될 그 짧은 순간에 오만 걱정과 불안이 밀려든다. 하지만 나는 무례한 사람이 함부로 내 기분을, 우리의 산책을 망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가 않다. 명백한 모욕을 당했는데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서 버리면, 당장 불쾌할 뿐 아니라 상대방이 앞으로도 나에게 태연하게 같은 무례를 반복하도록 허락하는 셈이니까.
그러니까, 용기를 내서 딱 한마디만 하고 돌아서자고 자주 다짐한다. 다짐을 실행하는 일은 아직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더 많지만 나는 계속 시도할 것이다. 시도하려 노력할수록, 계속해서 시도할수록
나를 위해, 뭉구를 위해 오늘보다 내일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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