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vegan)은 단계적 채식 실천의 최상급자가 아니라 모든 동물 착취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즉, 비건이라고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완전 채식주의자’라는 정의는 비건의 식생활만 똑 떼서 일반화한 협의에 불과하다.
비건의 정확한 정의는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비거니즘(veganism)이란 모든 동물의 삶을 존중하며 착취에 반대하는 철학이요, 삶의 방식이다. 그렇기에 비건은 비단 식생활뿐만이 아니라 삶의 전반에서 ‘동물을 착취하여 얻은 것’을 적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자 한다.
이를테면 동물의 살점과 알, 젖을 먹지 않는다. 동물을 이용하여 수확하거나 생산하는 커피, 코코넛 등도 먹지 않는다. 동물의 털과 가죽, 뿔로 만들어진 옷을 입지 않는다. 동물 실험이 이루어진 화장품을 쓰지 않는다. 동물을 보호하지 않고 소비하는 동물원, 동물 카페, 수족관 같은 공간도 이용하지 않는다.
콘텐츠 시청도 마찬가지다. ‘귀여운 아기 동물 먹이주기’ 같은 체험형 이벤트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볼 수가 없다. 아기 동물과 미인은 이른바 ‘필승 조합’으로 여겨지는 단골 소재인 만큼 매 순간이 사랑스럽게 연출된다. 나라고 예쁜 걸 모르겠는가. 깜찍한 아기 강아지와 어여쁜 아이돌이 함께 존재하기만 해도 내 안의 덕후 자아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비건 자아의 눈에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착취가 함께 보였다. 긍정적으로 포장된 대상화며 장기적으로는 동물권 저하에 기여할 법한 연출이 보이고야 만다. 그러니까 나는 최애 얼굴을 보면서까지 심란해지기 싫어서, 덕질하면서까지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콘텐츠를 피해 왔던 셈이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앞서 굿즈 소비에 대한 고민을 치렀기에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는지도 몰랐다. 어쩐지 후련하면서도 착잡한 마음으로 타임라인에 흘러들어온 방송 예고편들을 살폈다. 그러다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덜컥 보고야 말았다. 짧은 예고편에 느닷없이 등장한 붉은 살덩이를.
최애가 속한 그룹의 멤버 두 사람이 출연하는 방송 예고편에, 핏빛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 돼지 뒷다리가 떡하니 찍혀 있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가공되어 팩에 담긴 익숙한 형태조차 아니었다. 이제 막 돼지 몸에서 잘라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날것이었다. 불현듯 폴 매카트니의 말이 떠올랐다. 도살장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될 거라던.
예고편에 딸린 설명을 뒤늦게 읽어 보니 해당 방송에서 ‘하몽 만들기 체험’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몽. 얇은 종잇조각처럼 생긴 그 음식의 시작이 저 절단된 뒷다리라는 게 실감이 나서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물론 나도 안다. 그 방송의 제작자와 참여자가 동물을 착취하고 싶어서 하몽 체험을 선택했을 리 없다는 것쯤은.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몰랐다고 해서 원인이 가져오는 결과가 달라지는가? 모르고 저지르는 일은 어디까지 용납될 수 있을까? 그걸 판단할 깜냥이 나에게 있기는 한가? 또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이 시작됐다. 어덕행덕을 외치며 맘을 추스른 것이 방금 전이건만…….
게다가 내 덕질을 방해하는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굿즈도 콘텐츠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는 가운데 이번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
최애가 속한 소속사의 구 대표가 성범죄 가해자라는 뉴스가 떴다.
** 오늘의 덕질 일본어 **
진짜? マジで?(마지데?)
웃긴다! ウケる!(우케루!)
망했다. オワタ。(오와타.)
소속 아티스트를 보호해 주세요.
所属アーティストを守ってください。
(쇼조쿠아-치스토오 마못테쿠사다이.)
팬은 언제나 너의 행복을 빌고 있어.
ファンはいつもあなたの幸せを祈っているよ。
(환-와이츠모 아나타노시아와세오 이놋테이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