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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May 29. 2019

아들은 더 이상 필요 없어, 남편이 필요해

나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그저께 저녁 무렵 있었던 일이다.

남편이 퇴근길에 첫째가 먹고 싶다고 했던 소시지를 사 왔는데, 

첫째는 소시지를 받아 들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먹고 싶은 건 이 소시지가 아니라, 케첩에 볶은 소시지인데. 예전에 엄마가 해준 거 있잖아" 


이미 저녁식사 준비를 다 마치고 숟가락을 들기만 하면 되는데, 이제 와서 소시지 볶음 반찬이 먹고 싶다고?

그래, 시간도 충분한데 후다닥 만들지 뭐. 하며 남편이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얼른 양파를 썰고 케첩을 꺼내 소시지를 볶아줬다. 

씻고 온 남편이 식탁에 앉아서 소시지 반찬을 보더니 하는 말,


"이야, 이걸 또 먹고 싶다고 하니까 바로 만들어줬어? 첫째야, 넌 진짜 좋겠다.

아빠도 엄마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자기랑 결혼하지 말고 그냥 아들로 태어날 걸." 


남편은 종종 내 아들이고 싶다고 말한다.

처음엔 '음, 내가 좋은 엄마라는 칭찬이군' 싶었는데 한 번이 아니라 종종 그런 말을 하자 '내가 너무 아이들한테만 신경 써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육아휴직을 반기는 사람은 아이뿐 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부부의 팀워크가 정말로 중요한데, 둘 중 한 명이라도 근무시간이 유연하다면 훨씬 도움이 된다. 

대체로 엄마들이 유연 근무제를 사용하거나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집은 남편이 외근이 많은 일을 하는 터라 정해진 근무시간에는 사무실에서 꼼짝 못 하는 나 보다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내가 일하는 동안 아이를 매일 등원시키고, 혹시 아파서 아침부터 병원에 가야 하면 그것도 도맡아 했다. 

퇴근도 빨라서 아침에 내가 미리 만들어둔 반찬을 데워 저녁식사 테이블을 차리는 일도 거의 매번 남편이 했다. 물론 그 외의 모든 일은 내 차지이긴 했지만, 그래도 똑같이 일을 하면서 이 정도 챙기는 것만 해도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각자 자신에 대해서는 '알아서' 챙겨야 했다. 

특히 건강 관리도 알아서, 아침 식사도 알아서, 개인 착장도 알아서. 

가끔 세탁소에 옷을 맡기는 일을 하긴 했지만, 직접 와이셔츠를 다리거나 하는 일은 결혼 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신혼 때 산 스팀다리미는 3년 간 쓰지 않아서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였다) 


나의 휴직 이후에는 아이들은 온전히 내가 케어하고 있으니 남편은 자유롭게 출근하고 퇴근 후 바로 식사할 수 있는 생활을 하면서 말은 안 해도 전보다는 훨씬 편해졌을 것 같다. 

그간의 노고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더 많아졌다고 해도 전혀 불만은 없다. 

나름대로 여러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자꾸 나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육아휴직의 초점을 너무 '아이들'에게만 맞췄던 탓일까?  

나는 이미 아들이 둘이나 있어서 성인이 된 큰 아들은 이제 필요 없는데.

장난처럼 "아휴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고 쏘아붙이고 있긴 하지만, 만약 정말 내가 아이들만 신경 쓰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었다면 남은 휴직 기간에는 남편을 좀 더 챙겨주긴 해야겠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은 잡채. 

요리에 능숙하지 않고 손이 느린 나에게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가는 잡채는 기피 반찬 1호이다. 명절마다 시누이가 만들어 준 잡채를 맛있게 먹는 걸 알면서도 엄두가 안 나서 거의 만들어준 적이 없다.

조만간 재료를 준비해서 만들어줘야겠다. 

진짜 엄마는 되어줄 수 없지만 가끔씩 엄마의 손 맛(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을 느껴보라고. 


아마 나중에 복직하게 되면, 이제는 하나가 아니라 아이 둘을 데리고 동분서주하는 날들이 펼쳐질 텐데 그러면 내 아들로 태어나고 싶다는 이야기도 쏙 들어가겠지? 

내가 휴직하고 있는 동안 실컷 여유를 누리고, 복직하면 앞으로 또 잘해보자. 

성인 아들은 정중히 사양할게, 든든한 남편으로 함께 있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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