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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Jun 06. 2019

꼭 무언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휴직기간에도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해?

'육아' 휴직이지만, 하루 종일 아이만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둘째를 낳고 휴직에 들어오니, 첫째 때 한번 해봤기 때문인지 육아에 요령이 생겨서 둘째의 낮잠 시간 등을 활용하면 하루에 1~2시간쯤은 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아기를 돌보느라 외출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집에서 할 수 있는 일 중에 어떤 것을 하면 좋을지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수첩에 리스트를 적어가며 고민을 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남편은


"뭘 하려고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쉴 수 있을 때는 좀 쉬어!"


라고 했지만 그는 알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 자체가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80년대 중반 생인 나는 밀레니얼 세대,

어릴 적부터 차별 없이 교육받고 열심히 공부해서 치열한 입시와 취업을 겪었다.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취업시장을 흔들자 대학생활 후반부는 '스펙 쌓기'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학시험 점수, 자격증, 대외활동, 공모전...

무엇을 위한 스펙 인지도 모른 채 뭐든 할 수 있는 것은 다 찾아서 했던 것 같다.

언젠가 어디서든 쓸모는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뚜렷한 목표가 없었던 거로군, 하고 날 선 비판은 마시라.

그 시기에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지원해야 했다.

입사 원서 100개를 썼어도 면접은 많아야 2~3군데 볼 수 있다는 말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이공계가 아닌 문과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공대 출신인 남편의 대학생활과는 사뭇 다르다)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스펙 쌓기가 습관처럼 자리 잡아서

조금의 여유라도 생기면 뭔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야지만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육아휴직이 개인의 업무 커리어에서는 명백한 공백 기간이기 때문에

출발점이 같았던 이들과 비교해서 뒤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냥 그 시간을 육아 말고도 개인의 역량 향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써보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육아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거창한 목표를 세우기엔 시간과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고

운동, 독서 같은 막연한 계획은 잘 안 지켜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약간의 시간을 꾸준히 투자해서 할 수 있는 일로 어학공부를 선택했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나 어느 정도 선에서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고 제자리인 것이 재미가 없어서

왕초보부터 시작해야 하는 중국어를 선택했다.


중국어는 성조와 발음이 아주 중요한 언어라서 독학을 추천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첫째 육아휴직 때 중국어를 전공한 사촌동생에게 발음, 성조 단계의 기초는 도움을 살짝 받았고

기본서 1권 정도는 본 적이 있어서 이번 휴직 때는 기초 회화와 HSK 시험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혼자 하면 꾸준히 진행이 안될 것 같아서 워킹맘 카페(cafe.naver.com/workingmomlife)에서

모집하는 HSK 스터디에 참가했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모바일 채팅 스터디를 시작하게 되었다.

19년 1월에 처음 모임을 갖고 약 2개월 반 정도 꾸준히 시간을 내서 각자의 학습량을 공유하고,

응원을 아끼지 않은 결과 지난 4월 14일 치른 3급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물론 중국어 HSK 3급은 중급에도 훨씬 못 미치는 실력이라

어디 써먹을 수 있는 곳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쌩 기초 실력에서 꾸준한 노력 끝에 시험에 합격했다는 결과 자체가 무척 큰 성취감을 주었다.


휴직기간은 자칫 자존감이 떨어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단 매 월 내가 벌어들이던 수입이 없어지기 때문에 나에게 투자하는 소비를 줄이게 된다.

아이를 돌보는데 매진하다 보면 자기 관리는 점점 더 먼 얘기가 되고 거울 속 푸석푸석한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괜스레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데,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동기들의 잘 나가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다.


나도 안다.

누가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아이를 키워보겠다고 육아휴직을 선택했고,

모든 결과는 내가 초래한 것이지만

내 성격 탓인지, 밀레니얼 세대로 살아온 배경 탓인지 도무지 이 시간을 아이만 보면서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아쉽고 또 아쉽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무엇이라도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면 복직할 때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것 같다.


당초 계획보다 이르게 복직할 마음을 먹은 탓에 이제 복직까지 분기점을 지난 느낌이다.

목표했던 시험 합격으로 약간의 자신감을 얻었다.

자, 이제 무엇을 해볼까.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는 선에서 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하여 조금씩 앞으로 나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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