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임신, 첫 출산, 첫 아이. 모든 처음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가능하다면 첫째 아이를 서너 살까지는 기관에 보내지 않고 직접 돌보고 싶었다. 하지만 20개월쯤 입학해야 했다. 둘째 아이 임신 7개월이었기 때문이다. 출산까지 남은 3개월 정도라면 아이 처지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마칠 테고, 나 역시 집에서 신생아를 돌보기에 조금이나마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엄마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어린이집 선택 기준>이 있었다. 거기에는 ‘교사의 근속연수, 실내 규모 및 시설, 외부 활동 장소 유무, 특별활동 과목 및 추가 비용, CCTV 위치’ 등 다양한 항목이 포함됐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조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식이요법이 가능한가?’가 기준이었다. 부모는 아무리 힘들어도 두 시간마다 음식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단체 생활에 속하면 우리 아이만 특별히 더 챙겨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이 부탁을 수용할 만한 기관이 있을지, 있다고 해도 집에서 하는 것처럼 섬세하게 해줄 수 있을지, 특이사항이 지속되면 선생님이 지치진 않을지, 혹여나 선생님의 힘듦이 우리 아이에게 옮겨가진 않을지’ 등의 걱정이 많았다.
선생님의 실수로 정해진 용량보다 많은 탄수화물이나 당류를 먹어도 당장 큰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알레르기가 아니니 겉으로 드러나는 두드러기나 호흡곤란 등의 증상은 전혀 없다. 몸 안에서 간 기능이 서서히 악화할 뿐이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용량을 먹지 못하면 저혈당이 발생한다. 저혈당은 식은땀, 쳐짐 등 겉으로 증상이 드러난다. 심하면 저혈당 쇼크와 의식 저하까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시한폭탄 같은 아이를 받아줄 어린이집이 있을까?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여 ‘위급상황 발생 시 둘째를 데리고 첫째를 데리러 갈 수 있는 거리’의 어린이집을 검색했다. 다행히 도보 5분 이내에 두 곳이 있었다. A 어린이집 원장님은 내 설명을 이해 한 건지, 못한 건지 무미건조한 투로 “네, 네. 그렇게 할게요.”라고 했다. 흠. 믿음이 서지 않았다. 두 번째 방문할 어린이집에서도 비슷한 찜찜함이 느껴지면 기약 없는 가정 보육의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마음먹었다. B 어린이집 원장님은 나의 이야기를 모두 종이에 받아 적었다. 식이요법이 필요한 아이를 꽤 여러 명 경험해봤다고 했다. 최근에도 여러 종류의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어 식단 조절이 매우 까다로웠던 아이가 있었는데 만 2년 동안 다니다가 건강하게 졸업했다고 말했다. 상담과 동시에 입학을 확정 지었다. 아이의 세계에서 엄마, 아빠, 주치의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우리의 상황을 나누고 공감할 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생각에 집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2)
9:30 등원
10:00 오전 간식, 매일 죽(친구들의 절반만 제공해 주세요.)
11:00 전분물
12:00 점심 식사(쌀밥은 저울에 재서 정해진 용량만큼만 제공해 주세요. 탄수화물 성분의 반찬은 제외해 주세요. 대신 집에서 따로 챙겨 보내는 단백질 위주의 반찬으로 대체해 주세요.)
14:00 전분물
15:30 오후 간식, 매일 다름(집에서 따로 챙겨 보내는 대체식품으로 먹여주세요.)
17:00 전분물(하원 전에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당류가 많은 주스, 소스, 잼, 꿀, 사탕, 초콜릿 등은 먹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알림장 표지에 식사 시간표를 적어 코팅해서 붙였다. 식사에 필요한 저울도 보냈다. 첫인상대로 원장님은 우리 아이를 잘 챙겨주셨다. 약 20여 년간 이 일에 종사하며 당원병 환아는 처음 본다며 꼼꼼하게 돌봐주셨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식판 사진을 찍어서 내게 보내며 이렇게 먹이는 거 맞냐고 확인하셨다. 식사가 끝나면 남긴 양의 사진도 보내주시며 이 정도 먹었으면 혈당이 괜찮을지 물어보셨다. 일 년 가까이 남편과 단둘이 하던 일인데 드디어 동반자가 생겼다, 그것도 아주 든든한! 무엇보다 두 달 간격으로 이루어지는 정기검진에서 간 수치가 유지되는 걸 보아 신뢰가 더욱 두터워졌다. (간 수치는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유지만 돼도 다행이다.) 그렇게 나는 비교적 안정적인 상황에서 둘째를 낳을 수 있었고, 진정한 네 식구의 삶이 시작됐다.
(3-1)
두 아이는 같은 질병이었지만 식이요법은 전혀 수월해지지 않았다. 키와 몸무게, 혈액 수치가 모두 달라 전분물이 각자 몸에서 버텨주는 시간도 다르기 때문이다. 새벽 알람 개수는 두 배로 늘었지만 피곤함은 수십, 수백 배가 된 느낌이었다. 틈틈이 눈을 붙이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둘째를 겨우 재우고 잠시 새우잠을 청하려는데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낮에 먹어야 할 전분물 먹기를 거부한다는 거였다. 즉시 달려갔다. 둘째를 아기 띠에 메고, 첫째를 유모차에 태운 채 집으로 돌아오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아이들은 기관 생활을 못 하는 운명인 걸까? 선생님 한 명이 담당하는 인원이 적은 시골 학교에 다녀야 할까? 내가 꿈꾸던 직업여성의 모습은 영영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저 환아의 엄마로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걸까?’
(3-2)
어린이집에 학부모 초청 수업이 있던 날이다. 오전에 잠깐 한 두 시간 정도 이루어지는 일정이었다. 넓은 공간에 모든 인원이 동그랗게 둘러앉았고, 첫째 아이는 나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아이는 선생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아이의 어린이집 생활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어리둥절했다. ‘평소 수업 시간에 집중을 잘 못 하는 편인가? 아니면 오늘따라 낯선 어른들이 많이 와서 주눅 들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뿔싸. 아이 눈이 풀려있다. 앞머리가 땀에 축축하게 젖어있다.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울면서 내게 달려왔다. “엄마 배고파요. 주먹밥 주세요.” 비상이다. ‘주먹밥’이란 우리 가족의 은어다.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때문에 외출할 때 늘 보온도시락통에 주먹밥을 넣어서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닌다. 두 시간마다 매번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시간마다 식사를 하니 그사이에 굳이 배고프다고 말하지 않는 아이다. 하지만 눈이 풀리고, 땀을 축축하게 흘리며, 기운이 없고, 배가 고프다니. 이건 틀림없는 저혈당이다. 어린이집에 있던 비상용 주스를 급히 먹였다. 당류가 많아 설탕물과 다름없는 시판 주스는 혈당 조절과 간 수치에 최악이다. 하지만 비상시에는 어쩔 수 없다.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내 손으로 직접 아이에게 먹여야 하는 상황에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담임 선생님이 오전 행사에 집중하느라 우리 아이의 식사 시간을 놓친 거였다. 화가 났다. 선생님이 아니라 나에게 말이다. 누구를 위하여 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건지, 나는 엄마의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분노의 화살이 나만을 향하는 것은 억울했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 건지 모르겠는 신에게도 분노를 퍼부었다.
(3-3)
한 학기에 한두 번 정도 저혈당과 관련된 일이 발생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잘 돌봐주시기에 만족스러웠다. 밤낮으로 반복되는 간병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낮에 조금이라도 눈 붙일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둘째 아이도 돌쯤에 같은 어린이집에 입학시켰다. 삶의 질이 훨씬 나아졌다. 새벽 내내 잠을 설치며 고생해도, 오전에 두 아이가 등원하면 반나절 정도는 여유가 생긴다. 밤새 쌓인 젖병을 닦고, 밀린 살림을 하고,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잘 수 있다. 일터에 나가진 못했다. 가끔일지라도 아이들에게 저혈당이 생기면 즉시 달려가야 하므로 늘 집에서 대기하는 습관이 생겼다. 무엇보다 경제활동을 할 정도의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남편은 낮에 출근하고 정해진 월급을 받았다. 밤에는 숙면을 하는 날도 있었고, 내가 유독 피곤한 날에는 새벽 간병을 도와주는 날도 있었다. 우리 네 명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적응하며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학부모를 초청하여 어린이집 야외 활동을 하는 날이었다. 한바탕 체육활동이 끝나고 간식시간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시판 간식을 먹지 못하니 당연히 가방에 따로 챙겨갔고, 그것을 꺼내는 중이었다. 그 찰나에 선생님은 모든 아이에게 시판 주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아이가 맛있게 쭉쭉 마시는 게 아닌가. 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어? 이거 마시면 안 되는데?”라고 말했다. 말소리가 들렸는지 담임 선생님과 원장님이 깜짝 놀라며 우리 쪽으로 오셨다. 담임 선생님은 “이거 먹으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아이가 이 주스 좋아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원장님은 “이거 초록마을 제품이에요. 초록마을은 친환경 기업이고, 이 주스는 유기농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먹어도 되지 않나요?” 아, 너무 속상했다. 친환경이고 유기농이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제품을 뒷면에 표기된 ‘원재료명’과 ‘영양 정보’를 보면 당류가 잔뜩 들어있다. 부모가 아니고서야 이런 세세한 것까지 알지 못하며, 안다 해도 많은 아이를 돌보는 중에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 아이가 이 주스를 좋아한다고? 그 말은 지금 처음 먹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껏 이 주스를 몇 팩이나 먹은 건지 정확히 묻지 못했다.
(4)
희귀병 환아 당사자는 물론 부모에게도 세상은 너무나 가혹하다. 안정을 찾을 때쯤이면 한 번씩 마음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내가 잘 먹고 잘사는 꼴을 보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두 아이의 기관 생활을 종료하고 가정 보육을 할 자신도 없다. 나의 체력도, 두 시간마다 이뤄지는 식사 준비도, 발달과정에 알맞은 교육까지도 말이다.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우리 가족은 휘청거리고 삐걱거리며 남들보다 느리게 나아갈 것이다. 반대로 이 세상은 같은 속도로 흘러갈 것이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속도는 느리지만 방향만큼은 확실하게 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한글 떼기, 영어로 대화하기, 덧셈과 뺄셈 등을 ‘누가 누가 잘하나’ 하는 무리에 속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것은 느려도 ‘건강’이라는 방향만큼은 지키며 살기로 다짐했다. 그 건강에는 ‘나’의 건강도 포함된다. 장거리 마라톤과 같은 간병 생활을 이어가려면, 24시간 내내 두 아이를 품에 끼고 있는 것보다 낮에 잠시라도 남의 손에 부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죄책감도 점차 줄여보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삶이 아니라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를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이 방향키는 내가 잡은 것이라 스스로 되뇌었다.
(5)
첫째 아이는 내년에 5세가 되어 기관을 옮겨야 한다. 지난번처럼 ‘식이요법을 감당해 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마침 A 유치원 우선순위 조건에 ‘건강 취약 유아’가 있어서 전화했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다. 우리 아이의 사정을 설명했다. “밥양을 재는 저울은 유치원 직원이나 영양사가 아닌 급식실에서 배식해주는 아주머니께 드리게 될 거고요, 아주머니 근무표에 따라서 매일 다른 분께 전해질 수 있어요. 오후 간식에 치킨과 피자가 자주 나와요. 우리 유치원은 외부 음식 반입금지입니다. 대체 간식도 외부 음식에 포함되어요. 그래도 지원하고 싶으면 하셔도 돼요.”라는 답변을 들었다. 기운이 빠졌다. 처음부터 까다롭다고, 힘들 것 같다고, 불가능하다고 직접 얘기해줘도 되는데. 아픈 게 죄다. 어디에서나 을이다.
B 유치원은 사정을 듣자마자 “저희는 자신이 없네요. 못 챙겨줄 것 같아요. 힘들 것 같아요.”라고 답변했다. 출산율이 낮다면서, 출산장려정책을 시행한다면서, 아픈 아이는 제외하고 만든 정책인가? 유치원 지원 과정도 평범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렇지만 A 유치원의 빙빙 돌린 화법에 비하면 오히려 깔끔하게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C 유치원은 직접 방문했다. 원장님은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손을 꼭 잡아주셨다. 손으로 들어온 온기가 곧바로 심장으로 옮겨갔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평소에는 잘 챙겨줄 수 있는데 소풍, 체육대회 등 외부 활동이 있는 날에는 식사 시간을 놓칠 수 있으니 자진 결석해주면 좋겠다.’라고 답변했다. 이만해도 괜찮았다. 이미 경제활동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상태라서 하루 이틀 정도는 가정 보육을 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D와 E 유치원은 흔쾌히 받아주셨다. 다년간의 경력으로 다양한 식이요법이 필요한 아이들을 경험 해봤다며 우리 아이도 잘 돌봐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다. 이런 곳이 두 군데나 있다니 다행이었다. 최종적으로 D 유치원으로 입학이 확정됐다. 혼란스럽던 마음도 안정을 찾았다.
내 머리채를 잡고 불구덩이에 넣다 뺐다 하는 신이 늘 괘씸했지만, 이번만큼은 하늘을 향해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신이 있다면 들었을 테고, 없다면 나의 말은 허공에서 사라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