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반적으로 식사를 하면 음식물, 포도당, 글리코겐 순서로 바뀌어 간에 저장된다. 에너지가 필요하면 글리코겐이 다시 포도당으로 변화하여 혈당을 유지한다. 당원병 환자들은 선천적으로 간에 특정 효소가 결핍되어 있다. 글리코겐이 다시 포도당으로 나오지 못해 저혈당이 발생한다. 음식을 먹어봤자 간에 글리코겐이 점점 쌓일 뿐, 혈당 유지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음식을 안 먹을 수도 없고, 많이 먹을 수도 없고 무척 난감하다. 그래서 한 시간에 필요한 에너지만큼 계산하여 조금씩 자주 먹는 식이요법이 필요하다. 당류를 제한하는 것이 가장 좋다. 탄수화물 안에도 당류가 포함되어 있어 영양성분표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섭취 가능 용량은 키, 몸무게, 혈액 검사 결과 등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의사가 판단한다. 의대 전체 교육과정 중 당원병에 대해 배우는 분량은 교과서 반 페이지 정도라고 한다. 환자가 적어 연구된 결과가 적기 때문이다. 약을 개발하려고 해도 임상시험 대상자가 적다. 설령 약이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얼마 판매되지 않을 테니 여기에 관심을 두는 의사나 제약회사가 없다.
우리가 진료받는 S 병원 의사는 국내에서 당원병에 관심 두고 연구하는 유일한 의사다. 미국에서 진행하는 연구에 참여하고 의료기술을 배워 올 정도로 열정이 있다. 이런 의사와 인연이 닿은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애초에 만날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이 상황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신에게 감사해야 하는 걸까? 꽤 오랜 시간 동안 혼란스러웠다.
(2)
만 12개월 아이에게 처음 주어진 시간표는 온종일 한 시간 또는 두 시간 간격으로 식사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새벽에도 잠들어 있는 아이를 흔들어 깨운 후 무언가를 먹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까지 내가 해본 요리라고는 미역국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시중에 파는 음식을 아이에게 먹일 수 없으니 직접 요리해야 했다.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한 지인의 책을 빌려보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필요한 정보는 채 한 페이지도 되지 않았다. 이론적인 성분 이야기만 있을 뿐, 실질적인 요리법은 없었다. 책, 유튜브, 인터넷 등을 모조리 뒤졌다. 음식 재료부터 문제였다. 탄수화물과 당질 함량이 높은 고구마, 감자, 단호박, 당근, 양파 등은 제외했다. 아직 아이가 어려 씹을 수 없는 질기고 딱딱한 재료도 제외했다. 처음에는 마트에 가도 살 수 있는 재료가 별로 없어서 난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령이 생겼다. 단백질 함량이 높은 달걀, 두부, 생선과 잎채소 위주의 식단을 마련했다. 허용된 탄수화물 용량이 적어, 다 먹고도 아직 배고프다고 보챌 때는 단백질로 포만감을 채워줬다. (고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안 먹어준다.) 반대로, 잦은 식사를 하다 보니 먹기 싫어할 때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거실에서 노는 아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한 입씩 먹였다. 일부러 TV를 켜고 동영상에 몰두해있는 사이, 입에 몰래 넣기도 했다. 그동안 육아서에서 봤던 올바른 식습관은 절대 지킬 수 없었다. 낮에는 그런 식사 시간이 두 시간마다 반복됐다.
조금씩 자주 먹는 것이 좋지만, 아이가 잠든 새벽에는 식사할 수가 없다. 이때는 액체 형체로 된 전분물을 먹인다. 자다가 알람이 울리면 저울 위에 젖병을 올리고 정해진 양의 특수 분유와 옥수수전분 가루를 담아 물에 녹인다. 아이를 흔들어 깨운 뒤 발뒤꿈치를 바늘로 찔러 혈당과 케톤 수치를 확인하고 전분물을 입에 물린다. 깊은 잠이 들어 삼키지 못할 때도 있고, 잘 자고 있는데 깨웠다고 우느라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한참 실랑이 끝에 전분물을 먹인 후 아이와 함께 잠이 든다. 두 시간 후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일어나 같은 상황을 반복한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반복해야 했다. 과연 나의 체력이 버텨주었는가? 두 번의 대상포진으로 대신 대답할 수 있겠다.
(3)
어느 날은 알람 소리가 아닌 아이의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깼다. 피로가 쌓인 탓에 남편과 나, 둘 다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전분물을 먼저 먹인 후 발뒤꿈치를 바늘로 찔러 혈당을 확인했다. 43, 저혈당이었다. 저혈당 증상으로 울부짖다 지친 아이의 눈물 자국 위에 나의 눈물 자국이 덮였다. 이후부터 알람 소리에 더욱 예민해졌다. 알람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으면 쪽잠 보다는 빈방에서 잠을 쫓는 쪽을 선택했다. 남편과 아이가 깰까 봐 살금살금 안방을 빠져나와 작은방으로 간다. 방 한가운데 서서 괜히 기지개를 켜고 스트레칭을 한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남편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우리 부부가 동시에 망가지는 지름길이었다. 남편은 출근길에 졸음운전을 하다가 접촉사고가 났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남편과 상대방 모두 크게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당장 생계를 위해 돈을 벌지 않을 순 없었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밤에 잠이라도 푹 자라며 작은방을 내어주었다. 새벽 간병은 오롯이 내가 맡았다. 우리는 2교대 근무의 직원처럼 아침저녁으로 눈인사만 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였을까, 남편과의 사이가 멀어진 것이. 함께 잘 이겨내 보자고 선택한 일인데, 셋이 똘똘 뭉치기는커녕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밤낮으로 간병은 계속됐기에 안타까워하는 시간도 사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함과 외로움이 집 안을 가득 메울 뿐이었다.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근무할 때 만났던 환아의 부모들이 종종 생각났다. 남편을 볼 때면, 돈을 벌기 위해 면회를 자주 못 오던 보호자가 떠올랐다. 반대로 나를 보면, 아이를 위해 일상을 포기하고 보호자 대기실에 24시간 상주했던 보호자가 떠올랐다. 그들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이제 와 묻고 싶었다.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사랑의 표현이며, 가족을 위해 마음이 부서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제야 간호사가 아닌 보호자 편에서 그때의 상황을 헤아려보게 됐다. 가족 중 한 명의 아픔은 한 가정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발버둥 칠수록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4)
아이와 함께 다니던 교회에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다. 잠이 부족해서 피곤하고, 낮에도 두 시간마다 식사를 먹여야 해서 짐가방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교회로 향했다. 한동안 신을 원망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나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교인들은 말했다. “어머, 배가 빵빵하네~ 방금 밥을 많이 먹고 왔구나? 엄마가 요즘에 요리에 신경을 쓰더니, 맛있는 거 많이 해주시는구나~” 배가 빵빵한 것 말곤 모두 틀린 말이었다. 뒤돌아서 눈물을 삼켰다. 우리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니 사람을 원망하진 않았다. 온종일 여러 아이 속에서 우리 아이의 볼록한 배만 보였다. 곧이어 간식이 나왔다. 우리 아이가 먹지 못하는 과자와 주스였다. 아이가 낮잠 시간이 지나 피곤해하는 것 같다며 졸리지도 않은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도망쳤다. 신에게 위로는커녕 상처만 받은 채 집으로 왔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고 서서히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신이 우리 집을 못 찾는 것 같아서 내가 교회로 찾아간 것이었다. 그곳에도 신은 없었다.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우리 가족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을까? 애초에 신이 있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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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한동안 우리 가족의 동선은 집과 병원이 전부였다. 어두운 안방과 두 달마다 이루어지는 정기검진이다. 아이가 클수록 또래와 먹는 음식과 시간대가 다르니 친구들과 놀게 하기 힘들었다. 나 역시 아이를 두 시간마다 챙겨야 하니 지인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상과 단절됐다.
이제 와서 그날 들을 굳이 부정하거나 삭제하고 싶지는 않다. 집 안에 숨어 지내기로 선택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아이를 더욱 아끼게 됐다. 희미한 간접등에 의지하여 깊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볼 때 ‘이런 예쁜 얼굴은 나만 볼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한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지난밤에 저혈당 없이 무사히 지나갔구나’라는 마음이 생기며 새로운 하루가 주어지는 것에 감사했다. 아이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아이 덕분에 견딜 수 있는 모순의 연속이었다. 불행 사이에 간혹 찾아오는 행복의 끝자락을 붙잡고 하루하루 버텨냈다. 이 시기 나의 목표는 ‘전분물 원샷’이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다시 사회에 나가서 멋진 직업여성으로 살고 싶었는데, 어느새 나는 전부 지워지고 고작 전분물 원샷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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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아이의 키와 체중이 증가했다. 간 수치도 네 자릿수에서 세 자릿수로 좋아졌다. 그 덕분에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용량이 늘어났고 버틸 수 있는 시간도 한두 시간에서, 두세 시간으로 늘어났다. 줄어든 알람 개수만큼 나의 불평도 줄었다. 나름대로 요령도 생겼고, 아이와 손발도 맞아갔다. 그쯤 두 살 터울로 둘째가 태어났다. 임신 내내 불안했다. 두 아이가 ‘같은 운명’이라면 엄마로서 식단 관리가 익숙할 테고, 아이들은 또래와 다른 성장 과정에서 서로에게 의지가 될 것이다. ‘다른 운명’이라면 두 아이는 식사 등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것부터 많은 차이가 날 것이다. 나의 시선은 첫째에게 머물지, 첫째에게 신경을 쓰느라 가려진 둘째에게 더 머물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둘째가 같은 운명이길 바라야 하는지, 다른 운명이길 바라야 하는지, 이런 고민조차 잔인했다. 열 달 내내 둘째의 운명이 궁금했지만 임신 중에는 할 수 있는 검사가 없다. 신생아 딱지를 떼자마자 첫째와 같은 유전자 검사를 시행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두 아이 모두 희귀병이란다. 두 아이가 같은 운명인 건, 불행일까 다행일까? 알람 개수는 다시 늘어났고, 안정을 찾아가던 내 감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