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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지 Nov 27. 2024

희귀병, 부정에서 인정으로 건너가는 중입니다.

(1)

두 살 터울로 태어난 아이들의 연이은 희귀병 진단, 밤낮 할 것 없이 두 시간마다 챙겨야 하는 식이요법, 간격이 늘어봤자 세네 시간이라 여전히 숙면은 상상할 수 없는 일상, 지쳐가는 체력, 어쩌면 살짝 나른하고 무거운 감각이 정상인 듯 익숙해져 가는 몸, 점점 서먹해지는 남편과의 관계. 아무리 집 안에서 두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지낸다고 해도, 완치가 없다는 사실에 허무한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점점 더 깊은 땅속으로 들어갔고, 세상은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그런 시간이 쌓이다가 문득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속에는 ‘받아들여야 하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인정하기 싫은 마음, 몸과 마음이 힘든 간병을 포기하고 싶은데 포기할 수 없는 관계, 이런 혼란스러움 때문에 미쳐버리겠는 감정’이 모두 뒤섞였다. 때를 기다렸다. 스스로 초연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적당한 때’는 오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을 만한 큰 사건이나 깨달음도 없었다.      


그냥 인정해야 했다. 일단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야 당장 두 아이를 챙길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복잡한 속삭임을 무시하고, 순간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우리 가정에 주어진 운명을 말끔하게 인정한 단계는 아직 아니었다. 그저 간병을 나의 평범한 일상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해내는 정도였다. ‘삶이란 건 매번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구나, 인정하기 싫은 것을 인정해야 할 때도 있구나, 기가 막히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구나’ 하는 정도는 알게 됐다. 신은 이미 내게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종교의 힘으로 이겨내고 싶진 않았다. 세상과 정면충돌하여 스스로 깨닫고 싶었다. 그렇게 강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당분간 ‘나’를 찾지 말고 좋은 ‘엄마’의 역할에 집중하기로 했다.     


희귀병 환아 보호자로서 삶에서 맞닥뜨려야 할 커다란 도전들이 많다. 남들에게는 작은 도전처럼 보일지라도 내게는 크나큰 한숨을 마시고 내뱉어야 할 만큼 큰 도전이다. 당장은 어린이집 생활과 식단 문제이다. 미래에는 초등학교 입학, 급식, 또래 관계 문제가 있다.      


그중에는 ‘병원’과 관련된 어려움도 있다. 안 그래도 희귀병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서러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훨씬 서럽다. 당원병 환자들은 치료 약물도 없고 수술도 없다. 관리 방법은 오직 식이요법이다. 혈당 유지를 위해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하고 메뉴에도 제한이 많다. 그래서 먹지 못하는 상황에 취약하다. 영유아의 경우 목감기와 장염이 치명적이다. (초등생 때는 먹는 것 외에도 체력적인 부분, 예를 들면,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저혈당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가기도 한다. 아직 아이가 어려 경험은 없지만, 그 나이가 되기 전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 또한 숙제다.)     



(2)

첫째 아이가 당원병 진단받고 맞이하는 첫 겨울이었다. 목감기에 걸렸는지 며칠째 기침을 했다. 목이 아픈지 밥을 잘 못 넘겨서 죽을 해줬다. 죽도 잘 삼키지 못해서 더 곱게 갈아줬다. 이튿날 저녁 시간이 되기까지 온종일 먹어 준 것이 우유 500mL와 딸기 두 알이었고 아이는 당연히 쳐졌다. 저혈당으로 수액을 맞았고 그것을 시작으로 일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았다. 단지 목감기로 목이 아파서 음식을 삼키지 못한 것이다. 동네 병원에서는 주스든 요구르트든 과자든 일단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먹여서 입맛을 돋우고 기운을 차리게 하라고 하던데, 당원병 환아는 그런 것들을 먹지 못한다. 섭취 가능한 음식이 없다면, 수액 치료를 받는 것이 낫다. 하지만 포도당 수액도 많이 맞으면 간에 부담이 되므로 수액의 종류와 용량을 예민하게 설정해야 한다. 지역에서 유명한 아동병원이었다. 수액을 처방하기 어렵다며 평소에 진료받는 병원이 있다면 그쪽 의사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했다. 부랴부랴 S 병원에 연락하여 우리의 상황을 설명한 후 처방에 도움을 받았다.      


처음 겪는 모든 상황에 막연히 서러웠다. 흔하디흔한 감기조차도 이렇게 일이 커지다니. 아이도, 나도, 집에 홀로 남겨진 남편도 모두 불쌍했다. 그 당시 아이의 자장가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낯선 병실에서 밤낮으로 끙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주다가 더 이상 가사를 이어 부르지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하루에 충실하느라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이 그제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아이는 웃지도, 잠들지도 않은 채 가만히 눈을 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

두 번째 겨울에도 입원할 줄은 몰랐다. 이번에도 목감기였다. 기침, 고열, 쳐짐과 함께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 지난 입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이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고 이번에는 두 아이가 동시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환자 한 명당 보호자 한 명씩 상주할 수 있는 병원이었다. 생각대로라면 네 식구가 함께 입원하면 됐지만, 남편의 회사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입원 생활을 했다. 유전자 검사를 하고 당원병 확진을 내려준 대학병원이었다. 진단도 하고, 입원도 시켰으면서, 기존 질병에 영향을 미칠까 봐 조심스럽다고 아무런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기본 수액을 연결하고 기침 시럽을 줬다.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다면서 호흡기 치료도 해주지 않았다. 시간만 흘렀다. 지난겨울 입원 치료받았던 내용과,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간호사실에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호흡기 치료와 수액의 종류 및 용량 조절에 관한 의견이었다. 내 의견이 의사에게 전해졌고 회진 시간에 추가 처방이 이루어졌다.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 방도를 몰랐는데 어머님 의견대로 해보자고 존중해줬다. 그 판단에 여전히 감사하다. 시간이 지나 나을 때가 되어 나은 것인지, 나의 의견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잘 버텨주었고 약 열흘간의 치료 후 퇴원했다.      


(첫째 아이 기준에서 두 번의 겨울을 모두 병원에서 보낸 것이다. 지금 이 글은 11월 마지막 주에 쓰고 있다. 오늘 밤부터 며칠간 비와 눈이 내린다고 한다. 이번 겨울도 무섭다. 입원하는 일이 연중행사로 고정되지 않길 바란다.)     



(4)

이번에는 장염에 관련된 이야기다. 먹지 못하는 것만큼, 설사를 자주 하는 것도 혈당을 떨어뜨린다. 첫째 아이가 며칠 전부터 “배가 아파요”라고 하더니 음식 먹기를 거부하고, 수시로 변을 지렸다. 안 그래도 볼록한 배가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배에 가스가 가득했다. 통 먹지를 못하니 일단 주사실에서 수액을 맞고 집에 돌아와 입원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봤다. 의사 파업, 특히 소아과 의사가 파업하여 소아 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이 별로 없는 시기였다. 아이들의 진단을 내려주고, 지난겨울에 입원도 했던 대학병원에 문의했다. 소아과 의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장염’은 ‘경증’이므로 입원은커녕 진료 접수조차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매번 아픈 사람이 ‘을’이라고 생각하며 주눅 들어 살아왔는데 이번에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저혈당 쇼크 위험성이 있는 아이라고요!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 의료인 맞나요? 저혈당 쇼크가 경증이라고 생각하세요? 대답해보세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전화기 너머로 소리치는 목소리를 많이 들어봤다. 물론 상황에 맞지 않게 우기는 이도 있었지만, 보호자 의견이 옳고 진심으로 답답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꽤 많았다. 이제 내가 그 상황이 된 것이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르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일단 와 보세요. 오셔도 소아과 의사가 근무 중인 시간에만 접수할 수 있으십니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희귀병이라고 해서,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병원이 무조건 받아주는 곳은 아니라는 것을. 설령 입원시켜준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오직 가정에서 건강관리를 잘하고 정기검진 외에 병원에 갈 일이 없도록 예방하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됐다.      



(5)

정기검진을 위해 두 달마다 S 병원에 간다. 항상 구급차와 택시로 붐비는 본관 가는 길목, 각 층 곳곳의 의자마다 빼곡히 앉아있는 환자와 보호자들, 똑같이 생긴 컵을 들고 있지만 각자 사연이 다른 카페 내 보호자와 의료진들, 엘리베이터 앞에 줄지은 휠체어와 이동 침대들. 모두 뒤엉켜 어수선하다. 기둥을 지날 때마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펄럭인다. 이 풍경과 냄새에 익숙해지기 싫었다. 처음 일 년 정도는 주차장, 본관 1층 엘리베이터, 2층 검사실과 소아청소년과 외래만 들렸다. 병원 건물 내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진료가 끝나면 부랴부랴 병원을 빠져나와 멀리 떨어진 식당에서 주린 배를 채우곤 했다.      


일 년 정도가 지나고 용기를 내어 1층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사 먹었다. 이까짓게 뭐라고 오래 걸렸다. 병원에 마음을 열기가, 내가 이곳에 있다고 인정하기가 오래 걸렸다. 어느새 우리 네 식구는 진료를 마치면 지하 식당에서 식사하고,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진료 대기가 길어지면 옥상 정원에서 아이들과 산책한다. 병원이라는 공간을 자연스럽게 누비고 다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다.      


이날을 두고 우리 부부는 ‘두 달마다 성적표 받으러 간다’라고 표현한다. 학생들은 평소에 시험공부를 하다가 시험 당일에 결과를 보고 평가받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식사 시간표대로 열심히 관리하다가 혈액 검사, 엑스레이, 초음파 등 눈에 직접 보여지는 검사를 해야만 몸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다. 결과에 따라 그날의 기분도 달라진다. 검사 결과가 안 좋으면, 당연히 기분도 안 좋다. 속상함은 물론이고 체력을 포기하며 관리했던 시간이 허무하다. 반대로 검사 결과가 좋으면, 기쁘다. 두 달간의 노력에 보상받은 기분이고 아이의 몸에도 좋은 변화가 있으니 당연히 좋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이렇게 반복되는 삶이 이번 생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질병이 있다. 외모에서 드러나기도, 드러나지 않기도. 당장 입원이 필요하기도, 필요하지 않기도. 약물과 수술이 있기도, 없기도. 있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비싸서 없는 것과 다름없기도. 가족과 헤어질 날이 예측되기도, 그 정도로 급하게 떠날 상황은 아니기도. 각자의 상황은 모두 다르다. 때로는 상대의 상황을 보고 내가 더 힘들다고 절망할 수도 있고, 이 부분은 내가 더 낫다는 마음에 비겁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수많은 상황 중에 내가 위치한 곳은 어디이며, 도대체 어떤 이유로 억울함과 속상함이 풀리지 않는 것인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 완치가 없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육아휴직 기간에 잠시 ‘나’를 내려놓고, 복직 후 다시 ‘나’를 찾을 거라고 각오했다. 그런 마음 상태로 육아휴직 기간을 보내던 중 이런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대로 ‘나’를 영영 잃어버린 거라는 마음이 컸다. 아이가 주는 기쁨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아이들을 돌보려면 ‘나’를 지우고 좋은 ‘엄마’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엄마가 되려면 기꺼이 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나’와 ‘엄마’의 역할을 별개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이 끝나지 않는다니? 문득, 이대로 나를 잃어버리는 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아프면 오래 못 가.”      

어느 책에서 해답을 찾았다. 오래 가기 위해선 마음을 고쳐먹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동안 나는 딸, 친구, 직장동료, 배우자, 며느리의 역할로 살았다. 거기에 ‘엄마’라는 역할이 더해진 것뿐이다. 그래서 기존의 나의 모습에 엄마라는 역할이 추가된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이것도 곧 귀여운 단상으로 남았다. 아이의 세계에서 인생의 주인공은 본인 이고, 부모는 건강하게 지내도록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내가 뭐라고 그동안 아이 인생의 길이를 내 멋대로 재단하며, 당장 발생하지도 않을 헤어짐을 마음에 품은 채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몸과 마음에 좋은 영향을 주며 일 년이라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고민해야지, 어쩌자고 그렇게 슬픈 감정에 젖어있었는지. 그동안 어설픈 초보 보호자였다.     


그래도 그 시간이 헛되지는 않다. 그 모든 과정이 내게 필요한 과정이었다. 충분히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슬픔에 젖어있던 시간이 소중하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여러 깨달음이 있었다. 직접 보호자가 되어보니 그동안 만났던 보호자들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고, 식이요법에 협조를 잘해주는 아이와 관리가 힘든 아이, 두 명을 키우며 조금 더 넓은 범위의 보호자와 소통이 가능해졌고, 절망 가운데서도 어떻게서든 한 줄기의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이 생겼으며, 겉으로 웃고 있는 이들이 결코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계속 컴컴한 일상 속에만 있었다면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들이다. 갑자기 떠나게 된 제주 한달살이 덕분에 모든 내용을 조금이나마 앞당겨 깨우칠 수 있었다. 괴로움 속에서, 죽을 용기가 없어서, 세상의 끝에서,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떠났던 제주 한달살이가 나와 우리 가정에 주어진 운명을 달리 바라보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결코 돈이 넉넉해서 간 게 아니다. 당장 살아야 하니까, 숨통이 트여야 하니까, 일상에서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친 것이다. 먼저, 나의 종신보험을 해약해서 돈을 마련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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