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병 가정의 가장. 남편이자 아빠. 당신도 많이 힘들죠?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요. 남자라고, 아빠라고 힘든 감정을 가슴 속에 꼭꼭 담아두란 법은 없잖아요.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참지 말고, 속 시원하게 울어요. 그럴 자격 충분히 있어요.”
미리 밝혀둡니다. 이번 글에서는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저희 가정이 지난 봄, 어떠한 계기로 제주 한달살이를 했는지 그 비밀을 풀어내려 합니다. 같은 감정의 끝에서 결정된 일이었거든요. 희귀병인 두 아이를 바라보는 남편의 직접적인 감정을 제가 완벽히 헤아릴 순 없지만, 배우자로서 옆에서 바라본 이야기를 나누며 울어도 된다고, 무너져도 된다고, 다독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먼저 탈출하진 말라고, 과정은 힘들겠지만, 시간도 오래 걸릴 테지만, 우리 넷이 속도를 맞추며 천천히 나아가자고 덧붙입니다.
그럼 이제, 시작합니다.
(1)
육아에세이 또는 SNS 속 건강에 관련된 사연은 주로 ‘엄마’가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물론 우리 가정도 그중 하나다. 여자와 남자라는 성별과 감성의 차이인지, (외벌이면) 주로 아빠가 회사에 다니느라 시간과 체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대한민국 특유의 유전자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른 환아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부부 사이가 소홀해짐은 물론, 별거나 이혼으로 이어지는 가정도 많다. 엄마는 간병을, 아빠는 돈벌이하느라 각자의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왜 그 뒷면의 힘듦도 오롯이 부부가 감내해야 하는 걸까? 우리 부부 또한 이것과 관련된 큰 어려움이 있었다. ‘아이가 둘이니 각자 한 명씩 돌보기로 하고 헤어지면 되는 걸까? 당원병을 관리하는 의사는 전국에 한 명인데 외래 날짜를 맞추어야 할까? 따로 잡아야 할까? 환우회라는 소집단 안에서 자주 마주칠 텐데 이혼이 의미가 있을까? 이혼하면 이 생활이 나아질까? 정말 이것이 정답일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어쩌다 이런 생각까지 흘러왔지?’ 감히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나 자신이 너무 잔인해 보였다.
가족 중 환자가 있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환자 당사자도 내가 이런 운명일 줄 모른 채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며, 비장애 형제와 부모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이런 상황에 덜컥 놓인 것이다. 보호자도 힘들다. 그런데 왜 그 책임감을 보호자들이 뒤집어쓰고, 아파하고, 힘들어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티 내면 안 되는지, 그것도 하필 가장에게는 더욱 가혹한 것인지. 여전히 당신이 너무 안타깝다.
(2)
아이들이 희귀병을 진단받기 전, 간호사로 근무할 때 환자에게 온 정성을 다했다. 간호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진심이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꿋꿋이 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니까, 건강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일이니까. 직업관이 ‘낮은 자까지 돌보는 간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돈, 지역, 복지 정책, 주변 지지체계 등 모든 조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환자’를 낮은 자로 정의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간호를 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직업일 때는 퇴근하면 그만이었다. 두 시간 넘는 심폐소생술을 하고 퇴근하던 날에도, 수술실에서 미처 완벽하게 봉합되지 않은 채 중환자실로 이동하여 가슴을 누를 때마다 침대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피비린내를 맡은 날에도, 작은 유리병 주사 하나에 몇천만 원이라서 아이의 부모가 스스로 치료를 중단하겠다고 말씀하시던 날에도, 오토바이 사고로 찻길에 쓸려 전신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 피부 간호를 수행하고 다시 온몸을 붕대로 감아드리던 날에도, 전자발찌를 찬 남자 환자가 침대 모서리의 수액 걸이를 뽑아 들고 간호사들을 향해 휘두른 날에도, 퇴근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가족 보호자에게는 퇴근이 없다. 환자가 병원이나 시설에서 생활하는 가정이라도 마음 한편은 늘 환자에게 머물러 있다. 환자를 집에서 직접 간병하는 가정이라면 방, 거실, 화장실, 주방 어느 쪽으로 시선을 돌려도 늘 마음이 답답하다. 낮에 기관 또는 시설에서 반나절 생활하고 온대도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늘 머릿속은 그곳을 상상하고 있다.
(3)
이런 상황에서 남편은 회사까지 다녔으니, 그 힘듦은 내가 평생 헤아려도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두 아이의 잦은 식이요법과 갑작스러운 저혈당 상황 때문에 항시 마음을 편하게 누일 곳이 없는 가정이다. 여기에 편도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출근길 운전 시간, 부서원과의 관계, 회사를 대표하여 거래처와 협업하는 무게감, 제시간에 퇴근하지 못하는 회사 구조, 집에 남겨진 세 명이 잠들어 있을 때 출근했다가 다시 잠들어 있을 때 퇴근하는 씁쓸함, 일이 많으면 일주일에 6일 또는 7일도 출근하는 피로감이 더해졌으니 삶에 대한 허무함, 지구가 이대로 터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분노가 뒤따르는 건 당연했을 거다.
2교대 근무 직원처럼 출근과 퇴근 시 눈인사 두 번 하는 게 전부인 시기였다. 부부가 밥 한 끼 마주 보고 먹은 적이 언제인지 기억해 낼 수 없고, 남편은 삼시세끼를 회사에서 해결했다. 나는 두 시간마다 두 아이의 식사를 챙기며 남은 잔반으로 배를 채웠다. 그쯤일까? 어느 날부터 남편이 눈빛을 잃었다. 초점도 잃고 동공도 흔들렸다. 손도 떨었다. 영혼 없는 껍데기처럼 보였다. 베란다의 방충망까지 활짝 연 채로 허공을 응시하는 일이 잦아졌다. 무서웠다. 당장 약물치료가 필요해 보였다. 며칠간 설득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며 천천히 한 달 넘도록 설득했다. 드디어 남편 입에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초진을 받아보고 싶다는 대답이 나왔다! 불행 중 반가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회사가 너무 바빠 병원을 예약할 시간이 없었다. 허무했다. 그때부터 정신이 번쩍 들어 남편의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삼시세끼를 회사에서 먹고 온대도 간단한 야식을 곁들인 술상을 준비했다. 어색했다. 내가(네가) 언제부터 이런 걸 했다고. 우리는 그렇게 술 반, 정신력 반으로 버티는 날이 반복됐다.
가을쯤, 터질 게 터졌다. 남편의 감정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회사 일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나도 직장생활을 해봤지만, 저 정도의 업무라면 다른 스트레스가 없어도 오직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은 정도였다. 게다가 두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과 배우자(나)의 역할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무게감도 더해지니 답답했을 것이다. 매일 퇴근 후 울분을 토했다. 남편과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지만 그렇게 굵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처음 봤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회사를 그만두자고 권했다. 지금 통장에 돈이 얼마 남아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거기에 퇴직금이 더해지면 몇 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런 계산을 하는 나 자신을 혐오했다. 당장 사람을 살리고 봐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남편은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속이 답답했다. 약물치료도, 퇴사도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이 시기를 되돌아보면 ‘그놈의 돈이 뭐라고, 돈은 정말 잔인하다’라는 감정이 먼저 든다. 하지만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라고 한다. 책임감으로 버틴 것이라고. 이제야 깨달았다. 같은 부모일지라도 각자의 입장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내가 남편의 깊은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부분이다.
“가을이 그렇게 바빠? 그럼 이번 가을만 무사히 넘기고 초겨울이 되면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히자. 깔끔하게 올해까지만 일하고, 1월 1일 새해부터는 쉬자.”라고 의견을 나눴다. 둘 다 동의했다. 하지만 겨울에도 그 업무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퇴사 의사는 ‘다시 생각해 보라’는 답변으로 돌아왔다. 매서운 칼바람이 우리 집안을 쓸고 지나갔다. 한 두 달 정도 지난 후 다시 퇴사 의사를 밝혔다. 지금 당장 죽어버릴 것 같으니, 퇴사든 육아휴직이든 행정적인 종류는 상관이 없으니, 당장 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다. ‘퇴사가 좋겠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퇴사하자마자 위태로운 우리 집에서 도망가자는 대화를 나눴다. 당장 이사할 만한 상황은 아니니, 조금 긴 여행이라도 가자고 했다. 어디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적당한 곳이 떠올랐다. 제주도였다. 우리는 코로나 시기에 결혼한 부부라서 신혼여행지가 스위스에서 제주도로 바뀐 신혼부부 중 하나였다. 제주도로 결정한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 둘이 만나 가장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신혼여행 기간의 행복을 찾기 위하여, 초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쉽사리 집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거리가 먼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신혼여행 때 머물렀던 숙소의 최신 소식을 찾아보니 한 달씩 대여해주기도 했다. “그래, 좋아. 잘됐네! 인생 뭐 있어? 뒷일은 생각하지 말자! 현재의 행복만 찾으러 가자! 카르페디엠!”이라며 과감하게 한 달을 덜컥 예약했다. 남편 앞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뒤에서 조용히 나의 종신보험을 해약해서 돈을 마련했다.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답답한 이 집구석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오랜만에 설레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 기분은 퇴사를 한 달 미루라는 연락과 함께 망가졌다. 숙소, 차량 탁송 등 위약금을 날리며 취소해야 했다. 하, 아이들의 질병도, 부부 사이도, 정신건강의학과 초진 예약도, 퇴사도, 도망가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4)
그렇게 퇴사가 한 달 미뤄지고 모든 일정도 한 달씩 미뤘다. 제주 한달살이는 정말 멋질까? 다녀오면 지금보다 행복해질까? 한 달 후엔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 아니면 제주에 더 머무르게 될까? 막연한 기대 속에는 신에게도 빌지 않던 기적을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우리의 제주 한달살이를 여행으로 보아야 할지, 휴식으로 보아야 할지, 도망으로 보아야 할지 정체성을 정하기 어려웠다. 진실은 도망인데, 남들에게 보여지기로는 호화로운 휴가처럼 보여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말했다. “남편 잘 만났네. 부부가 같이 노는 거 보니 돈이 많은가 보네.” 우리 상황을 아는 소수는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 일단 사람이 살아야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다가 와.” 그렇게 우리는 절벽 끝에서 뛰어내렸다. 한달살이라는 가면을 쓴 채로 제주도로 도망쳤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우리 가정만 홀로 놓이니, 다른 가정과 비교하는 상황이 없어서 마음이 가벼웠다. 아이들의 볼록한 배, 특이한 식사 시간표도 눈치 볼 일이 없었다. 오직 우리 네 명의 손과 발이 맞아 갔다. 하지만 떠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당원병 관리가 힘들어서 도망친 건데 떠나온 곳에서도 같은 이유로 힘들었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과감하게 떠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오히려 나와 우리 가정에 주어진 운명을 달리 바라보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5)
제주 한달살이를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한 지 반년이 지난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당시 회사 맘대로 결정된 남편의 퇴사는, 다시 한번 회사 맘대로 육아휴직으로 바뀌었고, 언제 복귀하냐며 옆구리를 찔러대고 있다. 첫째 아이는 말이 늦게 터져서 걱정인 경우였는데, 그 사이 어휘력이 많이 늘었다. 지금도 가끔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고 싶어”라고 이야기한다. 둘째는 겨우 기어 다니는 아기였는데 어느새 부모의 손을 잡지 않고도 스스로 걷는 때가 되었다. ‘앞으로 절대는 글 쓰지 않으리, 글을 쓴다 해도 육아와 관련된 글은 절대 쓰지 않으리’라고 외치던 나 역시, 어떠한 계기로 무려 ‘간병 육아에세이’를 쓰고 있다.
겨우 한 달간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고 일상이 말끔히 바뀌진 않았다. 오히려 일상으로 복귀 후 처음엔 너무 똑같은 현실이라 놀랐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면서 흑백으로 보였던 세상에 서서히 색채가 깃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