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생물학이 초등 교실에 던진 질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단순한 과학책이 아니었다. 유전자의 시선으로 생명을 바라보는 이 책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교육’에까지 생각이 번져가게 했다. 교사인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매일 아이들과 부대끼는 교실이라는 작은 우주 속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시 묻게 되었다.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된 건, 최재천 교수님의 『희망수업』 덕분이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알면 사랑한다"라는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는 도킨스의 책을 하룻밤 내내 읽고 나서 새벽녘에 창문을 열며 세상이 이해되는 듯한 묘한 쾌감을 느꼈다고 했다. 왠지 그 감각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도 작정하고 책을 주문했다.
그런데 막상 받아든 책은 이미 우리 집 책장에 있었다. 2021년, 코로나 한가운데. 당시 어떤 특강에서 추천을 받고 샀던 책이었다. 앞부분만 읽고는 손을 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이번엔 끝까지 읽어보자, 마음을 다잡았다.
제목만 봐서는 유전자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 파헤치는 내용일 줄 알았다. '이기적 유전자'라니. 처음엔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도킨스가 말하고자 하는 건 ‘도덕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유전자가 스스로를 복제하고 생존하는 데 유리한 쪽으로 움직인다는 과학적 관점이라는 걸 알게 됐다. 중요한 건 ‘이기적’이란 단어가 아니라, ‘유전자’가 진화의 주체라는 발상이었다.
그 순간, 교실 풍경들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올랐다. 아이들이 친구에게 사탕을 나누어주고, 아픈 친구를 챙기고, 누군가 울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모습들. 도킨스는 그런 이타적인 행동도 유전자의 전략일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가까운 혈연일수록 돕는 이유는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매일 아이들에게 “친구를 도와주는 건 착한 마음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그 말이 과연 과학적으로 틀린 걸까? 아니, 그런 마음이 유전자로부터 시작되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고 ‘가르치고’ ‘키워줄 수 있다’는 게 교육의 본질 아닐까?
또 도킨스는 진화의 구조를 ‘경쟁’으로 설명한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 이기는 형질만이 다음 세대로 살아남는 냉정한 규칙. 그걸 읽는 순간, 우리 교육도 떠올랐다. 시험, 평가, 서열….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줄 세우고, 비교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교실은 그저 경쟁의 장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아이들에게 서로 협력하며 배우는 수업을 만들고 싶다. 함께 해결책을 찾고, 서로의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우와, 너 진짜 멋지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 그런 장면이 많아질수록 아이들은 ‘경쟁자’가 아닌 ‘같이 자라는 존재’로 친구를 바라보게 된다.
책 속에서 도킨스는 ‘밈(meme)’이라는 개념도 소개한다. 유전자처럼, 문화도 복제되고 진화한다는 이야기. 아이들의 말투, 습관, 생각… 교사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수업 방식까지도 모두 밈이 되어 아이들 속에 남는다. 이 문장을 읽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오늘 어떤 수업을 했고, 어떤 태도로 아이를 바라보았는지가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 어떤 밈으로 복제될지… 그 생각만으로도 교사라는 존재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책의 마지막에서 도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유전자의 꼭두각시이지만, 줄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꼭두각시다.”
이 문장에서 오래 머물렀다. 아이들도, 나도 유전자의 틀 안에 놓인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줄을 볼 수 있다. 그 줄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 줄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그 줄을 자각하고, 다른 줄을 스스로 엮어가는 힘. 나는 그것이 바로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책이지만, 나에게는 철학책이자 교사로서의 성찰서였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왜 우리는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지. 그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마주하게 해준 책. 그래서 오늘 나는 교실 문을 열며 다짐한다. 내가 건네는 말 한마디, 내 표정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에 ‘줄을 볼 수 있는 힘’이 되기를. 그 줄 너머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아이들이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 아이들도 묻기를.
“나는 어떤 밈을 남기며 살아갈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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