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3. 미라클 모닝이 아닌 미라 클데이로

by 초등교사 윤수정

새벽 기상을 실천하고 있지만 매일 내가 정한 시간에 일어나지는 못했다. 처음 새벽 기상을 실천했을 때,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새벽에 일어났을지라도 하루를 망친 기분이었다. 온종일 이루어 내지 못했다는 자책감, 불안이 밀려왔다. 내가 못마땅했다. ‘이렇게 의지가 약해서야. 내가 그렇지 뭐.’ 스스로 자책도 했다. 그런 날이 며칠 반복되더니 ‘이걸 해서 뭐 하나?’ 하는 허무함마저 들었다. 급기야 더는 새벽 기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완벽한 내 모습만을 그렸다. 그 완벽함에 흠집을 내는 조금의 오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2016년, 계획에 없던 늦둥이 막내를 낳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막막함에 고민이 많았다. 학교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육아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제자리걸음만 하는 내가 못마땅했다. 어차피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못 할 바에야 그냥 다 포기하고 싶었다. 어렵사리 땄던 박사학위도 휴지 조각 같았다. 한 학기 대학 강의를 끝으로 내가 계획했던 일들을 다 접어버렸다. 이제 더는 도전 따위는 없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적당히’를 외치며 ‘편안함’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막내는 다행히 건강하게 잘 자랐다. 나를 위한 성장은 없었지만, 아이가 무탈하게 크고 있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6년여 세월이 흘렀다. 코로나19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도 겪었다. 학생들이 학교에 오지 않았던 그 어느 날이었다. 텅 빈 교실처럼 내 마음도 공허했다. 바쁘고 힘든 일을 하지 않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지난 시간들이 허무했다. 특별히 불행한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행복한 것도 아닌 듯했다. 왜 그럴까? 생각했다.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내 모습이 보였다.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한가? 나는 손톱만큼이라도 어제보다 더 나아졌고 또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때 행복했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며 다 포기해 버렸던 그날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좀 더 참고 버텨볼걸.’ 당장 눈앞의 결과에 집착하며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며 스스로 주저앉았던 그 순간을 다시 돌려놓고 싶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전속력으로 달려야만 잘하는 것은 아니구나. 삶의 매 순간이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하구나.’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이었다.


토머스 에디슨도 말했다.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이 포기하는 그 순간이 자신이 성공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깨닫지 못한다.”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도 달리기를 멈추는 격이다. 내가 그랬다. 막내를 키우며 조금만 더 참고 견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물 밀들이 밀려왔다. 좀 더 빨리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조차도 쓸데없는 소모전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이라도 알았고 글로 남길 수 있으니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가도 어느 날은 알 수 없는 삶의 무게로 흔들릴 때가 있다. 새벽 기상도, 자기 계발도, 독서도 다 필요 없다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때일수록 성급하게 체념하고 포기하지 마라. 절대 함부로 결론 내지도 마라. 잠시 멈추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터널 위에 머무를 것인가? 끝까지 걸어가 터널 밖으로 나아갈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도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터널 밖의 밝은 태양을 반드시 마주할 수 있다. 포기로 인해 멈춰버린 성장. 그로 인한 쓰라린 후회를 맛본 나는 이제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꾸준함이 성공이다.”


나만의 방법도 생겼다. 힘들고 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그냥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바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그냥 뭐라도 한다. 기분이 나빠도,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해도 그냥 한다. 그것이 글쓰기라면 뭐라도 끄적인다. 노트북에 메모장에. 그것이 독서라면 10분이라도 책을 읽는다. 타이머를 맞추어 놓고 읽는다. 그것이 운동이라면 일단 밖으로 나간다. 설령 비가 와도 운동한다. 계단이라도 오르락내리락. 그것이 청소라면 청소기부터 꺼낸다. 그냥 하는 것이다. 그냥 하다 보면 그다음 할 일이 떠오른다. 더는 못할 것 같았는데 하다 보면 하게 된다. 우울함도 패배감도 더는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뭐라도 했다는 작은 성취감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한 시간에 새벽 기상을 하지 못했다면 ‘미라클 모닝’이 아닌 ‘미라클 데이’로 살자.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넘어졌다고 생각하면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다. 넘어졌다고 주저앉아 울고만 있다면 절대 그 길의 끝에 다다를 수 없다. 성급함이 가져오는 절망 속에 나를 가두어야 할까?


벤저민 프랭클린에 어느 기자가 물었다. “당신은 수많은 장애가 있는데도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까?” 프랭클린은 답했다. “당신은 혹시 일하는 석공을 자세히 관찰한 적이 있습니까? 석공은 아마 똑같은 자리를 백 번은 족히 두드릴 것입니다. 갈라질 징조가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백한 번째 망치질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마지막 한 번이 있기 전까지 내리쳤던 백 번의 망치질 때문입니다.” 세상 지루한 일을 매일매일 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오늘 내가 하는 노력이 바로 ‘마지막 한 번이 있기 전까지 내리쳤던 백 번의 망치질’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당장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 단박에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꿈꾸는 것은 위험하다. 『무지개 원리』를 쓴 차동엽 신부님도 말했다. “빠르게 성과를 올려 승진하기를 욕심내지 마라. 그것이 바로 패배감, 무력감, 좌절감의 원인이 된다.”


중국 극동지방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인 ‘모소대나무’는 씨앗에서 싹이 트고 수년간 농부들이 매일 정성을 들여도 4년간 고작 3cm밖에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대나무는 5년째 되는 날부터 하루에 무려 30cm가 넘게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게 6주 만에 15m 이상 자라게 되고 곧 주변은 빽빽하고 울창한 대나무 숲이 된다. 어떻게 6주 만에 폭풍 성장을 할 수 있을까? 6주 만에 급격한 속도로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모소대나무는 씨앗이 움트고 나서 4년 동안 땅속 깊이 뿌리를 뻗친다고 한다. 성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땅속 밑으로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린 것이다. 당장 눈앞에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며 실망하지 않고 더 크게 자라기 위해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모소대나무에게 배울 점이 많다. 결과나 성과에 의존해 내면의 뿌리를 내리는 데는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나 자신을 돌아본다. 깊게 뿌리를 내려 더 단단히 자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모소대나무를 통해 ‘기다림’과 ‘꾸준함’의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다시 기억하라. 성급한 속단으로 눈앞의 결승선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가짜 절망에 속을 수야 없지 않은가?


1510015.jpg?type=w773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새벽기상

#미라클모닝

#새벽3시




keyword
작가의 이전글12. 엄마가 바뀌니 아이들도 바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