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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Oct 28. 2024

듀오 헤븐 (3)

단편소설

듀오 헤븐 (3)





  약속 전날의 점심시간, 우리 팀의 사원 우미연 씨와 함께 식사한 뒤에 스타벅스에 갔다. 미연 씨는 고개를 숙인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눈을 껌뻑였다. 내가 결혼정보회사에 회원으로 등록했다고 하자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히 돈만 낭비하는 거 아닐까요? 그 결혼정보회사 이름이 뭐죠?”

  “점프 투 러브. 얼마 전에 출범한 신생업체인데, 가입비도 저렴하고 만남 주선도 다른 곳보다 5회 정도 더 많더라고.”

  “점프 투 러브? 점프 투 로열웨딩도 아니고, 러브라고요? 가벼운 만남 주선하는 데이팅 앱 이름 같네요.” 미연 씨는 휴대폰을 들더니 뭔가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결혼정보회사라고 당당하게 쓰여 있던데.”

  “연애와 결혼 중간의 틈새시장인가요? 그런 곳도 있다고 해요. 아무튼, 신박한 이름이네요. 으음. 검색해 보니, 상류층 상대하는 노블사는 아니고, 일반사군요. 그 여자분 만날 때, 커플 매니저도 함께 참석하나요?”

  “아니, 내가 등급이 낮은 회원이라서 그런지 그냥 상대 연락처와 약속 장소와 시간만 보내주더라고. 맞춤형 서비스는 거기까지인가 봐. 그런데, 여자 쪽에서 약속 장소와 시간을 변경했어. 급한 사정이 있다면서.” 

   미연 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시 커피를 홀짝이며 눈만 껌뻑였다. 




  약속 장소인 카페 듀오 헤븐은 입구 간판부터 눈길을 끌었다. 액정 모니터 위에 'Duo Heaven'이라고 적힌 진홍색 칠러 체 문자는 한눈에 봐도 공들여 제작한 것이었다. 세련된 간판 디자인은 으스스한 스릴러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결혼을 전제로 한 남녀의 첫 만남 장소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카페 이름인 ‘듀오 헤븐’의 뜻도 얼른 와닿지 않았다. 듀오는 ‘둘’ 또는 ‘한 쌍’ 또는 ‘이중주곡(二重奏曲)’을 의미한다. 헤븐은 천국, 하늘나라, 낙원이다. 그러면, 한 쌍의 천국? 천국이 두 개 있다는 건가? 뭔가 이상했다. 어쩌면 듀오를 연인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일지도 몰랐다. 말하자면 듀오 헤븐은 ‘한 쌍의 연인을 위한 천국’이란 의도일지도. 그렇다면 듀오스 헤븐(Duo's Heaven)이라고 했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페에 들어섰다. 결혼정보회사가 직접 운영하는 카페도 아니고 커플 매니저가 소개할만한 장소가 아닌 게 분명했다. 밝고 화사한 실내 분위기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듀오 헤븐은 그저 어둡고 코믹한 B급 장르 영화 컨셉이 가득했다. 뱀파이어를 연상시키는 창백한 남자와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힌 악녀가 등장하는 영화 포스터, 흑백 영화 시대의 공포물에 등장하는 프랑켄슈타인 스타일의 인물화, 서양의 고딕풍의 저택과 중세시대의 마녀를 그린 그림들이 실내 장식을 이루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을 지닌 남자 종업원이 고개를 숙이며 나를 맞이했다. 문득, 회사에서 젊은 계약직 여자들에게 “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운영팀의 남자가 떠올랐다. 항상 떫은 표정으로 18세기에서 나온 듯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걸어 다니는 이 친구는 힘없는 계약직 여자 직원들을 괴롭히는 성향이 있었다. 옷차림이나 근무 태도 같은 것을 지적하며 트집을 잡곤 했다. 그래서 계약직원들은 그를 프랑켄슈타인 같다고 욕하며 약칭으로 “켄”이란 별명을 지어 은어로 사용했다. 확실히 젊은 사람들이 별명을 짓는 데에 뛰어난 감각이 있었다. 나는 터놓고 지내는 동료인 미연 씨에게 혹시 내게도 별명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미연 씨는 아니라고 했다. 별명은 밥맛 없는 인간에게만 붙인다는 거였다. 나도 언젠가는 여자 직원들에게 밥맛 없는 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그다지 기분 좋은 상상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미 내게도 어떤 별명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이없어하던 미연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괜히 돈만 낭비하는 거 아닐까요? 글쎄 그럴지도 몰랐다. 듀오 헤븐의 분위기를 보자, 돈만 낭비하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커졌다. 그래도 조해선이라는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었다. 막연히 ‘희망’ 같은 것을 계속 품어보기로 했다. 나는 입구에서 잘 보이는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 카페를 더 살폈다. 자세히 보니, 듀오 헤븐은 20대 중반 우울한 시절의 내 취향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음악은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애니멀의 <Pigs(Three Different Ones)>가 음산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페 중앙에는 서구 중세시대에서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해양 시계가 있었다. 약속 시각이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다.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고풍스러운 의자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결혼하면 어른이 되는 걸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내를 얻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면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저절로 생겨날지도 몰라.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른이 된다는 건 부모가 된다는 뜻일지도 몰라.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외부 환경적인 조건이 아니라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솟아 나오는 자신감, 내 존재에 대한 생생한 이유, 삶에 대한 애정, 불안과 고독에도 흔들리지 않는 독립심과 생활력, 뭐 그런 심정적인 것들이었다. 다만,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리는 외적인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성장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위로가 되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마음으로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한 것도 어찌 보면 결혼이라는 계기를 스스로 마련하여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기도 했다.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아이의 아빠가 된다고 해서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어쨌든 결혼은 삼십 대 중반인 내게 더 미루기 어려운 과제로 여겨졌다. 종업원 켄이 내게 와서 메뉴판을 건넸다. 뭔가 주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50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일단 콜라를 한잔 달라고 했다. 잠시 뒤 종업원 켄이 얼음이 든 컵과 캔 콜라를 가져와 테이블에 올렸다. 핑크 플로이드 음악은 돼지 세 마리가 끝나고 양 떼(Sheep)라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울한 음악 때문인지 괜히 마음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할 때, 휴대폰에서 문자 메시지 도착 알람이 울렸다. 눈만 껌벅이던 미연 씨가 보낸 문자였다. 



(계속) 내일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


대문 출처 : 움베르토 보초니, <거리의 힘들>과 <동시적 시각들>에 대한 연필 습작. 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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