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토요일은 밤이 좋다는 옛날 노래가 생각났다. 연인들은 당연히 밤이 좋겠지. 토요일은 특히 온밤을 꼬박 붙어있고 싶겠지.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없는 청춘도 토요일 밤이 마냥 좋을 게 분명해. 클럽, 헌팅포차, 유흥주점에서 낯선 이성과 즉석 부킹을 할 수도 있고. 혹은 친구들과 모여 밤새 웃고 울며 떠들고 취할 수도 있으니. 하지만 나처럼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자 하는 30대 중반의 남자는, 토요일 밤이 자칫 피곤할 수 있어.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티티가 마른안주의 오징어 다리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당차게 씹었다. 가격은 비싸고 양은 적고 맛은 평이한 수입 맥주를 병 채 들고선 꿀꺽 마셨다. 나는 자리를 빨리 매듭짓기로 마음먹었다. 조해선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 건지, 다시 미팅 약속을 잡을 수 있는 건지, 그것부터 신속하게 알아내기로 했다. 빨리 묻고 빨리 듣고 빨리 일어나자고 빨리 다짐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은 앨범 끝까지 듣고 싶었다. 너무 멋진 음악 아닌가. 티티 역시 서두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느긋했다. 나의 첫 번째 질문에도 느긋하게 대답했다. 조해선이 지난 며칠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잠을 전혀 못 잤다고. 오늘 쓰러져 자고 있다고. 자신에게 나를 잘 대접하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다음 약속은 아마도 가능할 거라고. 다만, 두 어 개 사소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밝은 미팅이 가능할 거라고 덧붙였다. 잇츠 롱 스토리! 제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보시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은, 그냥 부담 없이 저랑 술친구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티티는 다시 두 사람의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벗어나면 바깥에 하이에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둘에게 마치 영원히 지속할 것 같은 불멸의 우정을 느끼게 해 주었어요. 여자 일진이 남자들보다 더 살벌하거든요. 걔네들은 순진한 우리 둘을 괴롭히는 것에 긍지를 느꼈고 해선이와 내가 지닌 우정의 긍지를 증오하거나 부정했어요. 하지만 사냥감 잘못 고른 거죠. 제가 공수도 유단자였거든요. 하이에나들이 덤벼드는 걸 전부 물리쳤어요. 하나는 턱을 쳐주고, 하나는 집어던지고, 하나는 다리가 휘도록 밟아주었죠. 그랬더니 나머지는 모두 물러섰고요. 해선이와 나는 그 사건으로 더욱 친해졌어요. 우리는 늘 붙어 다녔어요. 주말에는 내 방에서 같이 밤새워 놀았죠. 해선이는 눈으로 읽는 것보다 귀로 듣는 걸 더 좋아했어요. 작은 아씨들 같은 소설책을 제가 읽어주었죠.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목소리로 연기도 하게 되잖아요. 그때 전 알았죠. 제가 배우가 될 운명이라는 걸. 그렇게 말하곤, 티티는 손을 들어 종업원 켄을 불렀다. 켄은 미끄러지듯 조용히 다가왔다. 종업원 전문과정 자격증을 보유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티티는 내게 묻지도 않고 맥주 두 병을 다시 주문했다. 저는 맥주를 사랑해요. 인생이나 사랑이나 기후변화이거나 핵미사일 같은 거에 대해서는 거짓말해도 맥주에 대해서는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값도 거짓말할 것 같지 않았다. 티티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해선이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했어요. 저도 뭐 열심히 해서 어느 인서울 대학교의 연극영화과에 들어갔어요. 학교가 달라서 매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주 만났어요. 인생이나 사랑이나 핵미사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서로를 격려했어요. 에이, 뭐 저는 뭐 연애도 많이 했지만, 우리 해선이는 대학교에서도 공부만 했어요. 진짜랍니다. 대학교를 순진하게 졸업한 해선이는 국내 최고의 화장품 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업하고, 저는 연극배우와 모델 일을 하면서 영화 출연 기회를 잡으려고 그 바닥을 기웃거리고 있고요. 해선이네 집은 경기도인데 출근만 두 시간이 넘는 거리랍니다. 그래서 야근하거나 회식하거나 하면 자기네 집을 포기하고 내가 혼자 사는 월세방으로 오곤 했죠. 그러다가 그냥 내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어요. 저는 월세 부담을 덜고, 해선이는 출퇴근 시간을 줄이고요. 해선이가 아무리 대기업에 취업했다 한들, 갑자기 부자 되는 건 아니잖아요. 중간 간부나 임원 정도는 되어야 목돈도 마련하는 거지요. 우리 해선이는 결혼비용 저축한다며 알뜰살뜰하게 근검절약하며 살아온 친구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떨어져야 하는 일이 얼마 전에 생겼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뭔가 빨리 하려고 했지만 그게 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티티는 그 지점에서 빈 맥주병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 맥주는 배가 부르네요. 우리 이제 다른 거 마셔요. 테킬라 어때요?
(계속) 내일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
대문 출처 : 움베르토 보초니, <거리의 힘들>과 <동시적 시각들>에 대한 연필 습작. 19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