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크리스마스 특집 단편소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 스핑크스를 따라 큰길로 달린다. 눈이 더 세게 더 많이 내린다. 스핑크스가 차도로 뛰어들더니 빠른 속도로 길을 건넌다. 다행히 달려오는 차가 없다. 나도 차도로 뛰어들어 길을 건넌다. 하지만 스핑크스를 따라잡기에는 힘이 벅차다. 다시 숨이 차오른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벤톨린을 찾아 꺼내 흡입한다. 그 사이에 스핑크스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눈은 점점 더 세차게 내린다.
스핑크스의 발자국만 눈 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나는 발자국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외진 동네라서 그런지 토요일 밤이어도 인적이 드물다. 미미의 얼굴이 떠오른다. 스핑크스를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뭐라고 할지 걱정이다. 괜히 놈을 데리고 나온 것 같다. 눈이 그치면 지금보다 더 추워질 것이고 그러면 길 잃은 녹색 고양이는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나의 어리석은 행동이 후회스럽다. 빨리 찾아야 한다.
나는 속보로 눈 위의 고양이 발자국을 따라간다. 하지만 점점 더 두텁게 쌓이는 눈 때문에 더 이상 발자국을 찾을 수 없다. 코에서 콧물이 흘러내린다. 코를 훌쩍이면서 걷는다. 스핑크스! 야, 친구야! 불러도 본다. 눈이 따갑다. 내가 잘못했어! 제발 돌아와. 너 애인 필요 없잖아! 하지만 스핑크스는 보이지 않는다.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눈길을 몇 분을 걷다가 보니 눈앞에 지하보도가 하나 나타난다. 나는 지하보도로 내려가는 계단을 살핀다. 고양이 발자국 같은 얼룩이 드문드문 보인다.
지하보도를 향해 내려간다. 숨이 차서 중간에 잠깐 쉰다. 난간을 잡고 천천히 내려간다. 등 뒤에서 찬 바람이 불더니 눈발이 흘러들어 흩날린다. 지하보도의 바닥에 이르러 코너를 돈다. 아,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스핑크스가 보인다. 거기 가만히 있어, 하고 외친다. 내 목소리에 스핑크스가 나를 돌아다본다. 그런데 스핑크스 앞에 뭔가 놓인 게 보인다. 나는 걸음을 멈춘다. 겁이 난다. 절로 눈을 가늘게 뜨고 스핑크스 앞의 커다란 물체를 살핀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다. 나는 조용히 다가간다. 노숙자다!
스핑크스는 미지의 노숙자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추워서 모포 사이로 들어가고 싶은 걸까. 노숙자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낡은 누더기 모포로 몸을 둘러싼 채 지하보도 한가운데에 누워 잠들어 있다. 힘들고 지친 모습이다. 스핑크스는 더 이상 나로부터 도망가지 않는다. 내 곁에서 노숙자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천천히 스핑크스를 끌어안는다. 갑자기 놈이 갸르릉 거린다. 그때 뭔가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내 발끝에 걸린다.
스핑크스가 다시 한번 긴 울음소리를 낸다. 나는 스핑크스를 쓰다듬어 주면서 발밑의 물건을 바라본다. 걸인의 깡통 같다. 아니, 자세히 보니 작은 상자다.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모양이다. 낯이 익다. 아니, 이럴 수가! 나는 눈을 크게 뜬다. 언젠가 미미가 그려준 판도라의 상자가 바로 내 눈앞에 놓여 있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이게 여기에 있는 걸까? 의아하다. 나는 스핑크스를 껴안은 채 쪼그리고 앉는다. 스핑크스가 달아나지 못하게 가슴과 무릎으로 끌어안고 상자를 찬찬히 관찰한다. 더러운 때와 먼지가 자욱하지만 오래된 골동품이 분명하다.
노숙자의 것일까?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앞에 누워 있는 노숙자를 살핀다. 오십 대 어쩌면 육십 대 남자다. 얼굴이 검고 주름이 가득하다. 머리는 반백이다. 남자는 약한 숨소리를 내며 코를 곤다. 나는 눈을 돌려 다시 골동품 상자를 본다. 그런데 상자의 뚜껑이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포 사이로 기이한 상형 문자의 형상이 그려진 상자의 뚜껑이 비죽 나와 있다. 나는 뚜껑을 살짝 끄집어낸다. 뚜껑을 든 채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텅 비어 있다. 아니다. 동전이 하나 들어 있다. 그런데 동전 옆에 작은 고리가 보인다. 나는 상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고리를 만진다. 살짝 잡아당겨본다. 손끝에 걸린 고리가 위로 조금 올라온다. 나는 깜짝 놀란다. 손을 뺀다.
판도라의 상자가 틀림없다!
미미가 한 말이 떠오른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또 다른 뚜껑이 있고 그 안에 진짜 희망이 갇혀 있다고 한 말이 귓가에 울린다. 상자 안에 또 다른 뚜껑이 있고 그 안에는 진짜 희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