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시일까?
시인이라 믿고 싶어 깜박이던
빛을 보고 걸어갔다
어느 메모지에 급히 끄적인 시를, 오래 지난 뒤에 다시 읽었다. 재훈은 자신이 쓴 시인지, 이미 오래전에 떠나간 지은이 쓴 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지은은 자신이 쓴 시에 항상 ‘재훈’이라는 이름을 적어 보내곤 했다.
“이 시는 네게 쓴 것이니까, 주인은 너야.” 지은은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들이 재훈으로 하여금 지은을 더 사랑하게 만들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지은의 언어는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그려졌다. 보지 못하기에, 모든 감각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평범한 재훈보다 더 잘 듣고, 더 민감하게 온도 변화를 감지했다.
“비가 오려나 봐.”라고 말하면, 한 시간 안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말하지 않아도 발자국 소리만으로, 냄새만으로도 재훈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고기 냄새를 풍기고 들어온 날은, 지은은 커피를 마시자고 했고, 재훈이 땀을 뻘뻘 흘리던 날은 삼계탕을 먹자고 했다.
지은의 감각은 재훈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생생했다.
“지은의 시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특별한 거야.”
재훈은 가볍게 말했다. 재훈은 눈먼 지은의 시를 아무렇게나 구겨버렸다. 그는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지극히 평범한 자신의 시력 1.0이 징그럽도록 지겨웠다.
‘나도 눈이 없었다면, 나머지 감각으로 예민하게 세상을 그렸을지도 몰라.’
그 생각이 불안으로 몸을 덮쳤다. 눈을 감고 걸었다.
20초도 걷지 못하고 두 눈을 번쩍 뜨고 지은의 손을 잡았다.
“눈을 너한테 줄까?”
“왜? 내가 불쌍해?”
“내가 보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상관없어. 안 보여도, 나는 알아. 네가 어떤 사람인지, 뭘 원하는지도.”
재훈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지은에게 질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지은의 손을 잡고 앞장서 걸었지만, 그 손끝에 묶인 채로, 정작 그녀의 그림자에 갇힌 이는 재훈 자신이었다.
지은은 재훈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꽂아 넣고 있었다. 거울 속 지은의 얼굴을 본 재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멀리, 아주 멀리 갈 거야. 너에게서'
몽롱했던 의식이 되살아났고, 그 순간, 재훈은 지은의 손을 놓고 도망쳤다.
신춘문예에 재훈의 시가 당선되었다.
“눈을 줄 테니, 시를 줘.”
눈 한 줌, 시 한 줄이면
밤은 더 깊고 밝게 울 것이다.
재훈은 한 줄의 시를 남기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