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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Apr 08. 2019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긴 여정의 첫 번째 도시, 블라디보스톡

잠을 설쳤다. 과식이나 긴장, 둘 중 하나겠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새벽빛에 깨어 샤워를 한다. 여행의 모든 길 위에서 무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동생과 먹는 아침. 어쩐지 울컥한다. 어깨에 배낭을 메자 몸이 흔들린다. 동생은 말한다. “잘 다닐 수 있겠어?”

공항에 도착한 오전, 배낭을 막 풀었을쯤 할머니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우리가 나눈 대화는 지극히 평범했지만, 할머니의 짧은 문장은 여행의 동력이 된다. 편의점 닭죽을 먹고 엄마가 좋아하는 츄이스티를 샀다. 그리고는 당찬 미소를 지으며 탑승장으로 향한다.




블라디보스톡의 첫날. 상상도 못 한 강풍과 함께 비가 내렸다. 일단 숙소에 짐을 풀기로 한다. 러시아에서 두려워해야 할 건 사람이 아니라 바람이었다. 무슨 바람이 이렇게 부는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겨울 옷이라곤 얇은 니트와 경량 패딩뿐인데, 큰일이다. 별 수 없이 있는 옷을 전부 꺼내 입고 방을 나섰다. 추워도 밥은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저녁거리를 사러 나갈 때쯤, 스태프가 말을 걸어온다.


새하얀 얼굴을 가진 러시아인이 정확한 발음으로 한국말을 한다. 크셰니아는 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며 한인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마침 퇴근 시간이니 길을 설명해준다고 한다. 그녀는 환전소에서 달러를 루블로 바꿔주고, 마트의 위치를 알려줬다. 그런 뒤에는 브리또가 맛있는 가게가 있다며 같이 가겠냐고 묻는다. 고민할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외계어로 주문을 시작한다. 우산 아래, 빗소리에 숨어 한국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참 후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루블을 세고 있는데 크셰니아가 재빨리 계산한다. 러시아에 온 걸 환영하는 의미로 맛있는 브리또를 선물하고 싶다며. 아아, 블라디보스톡의 날씨는 나를 지치게 했지만, 천사 같은 스태프를 만나 좋은 기운이 가득 채워진다. 선물을 품에 안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본다. 내일은 싱그러운 아침을 맞을 수 있겠군.






눈을 뜨자마자 냉장고에 넣어둔 살구를 꺼내 먹는다. 흐린 먹구름이 다른 마을로 떠나 주길 바라며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어제보단 맑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한국인 동행과 함께 ‘우흐 뜨 블린’에 가기로 한다. 이른 아침부터 팬케이크라니. 내키진 않았지만 러시아에 온 기분을 내기엔 더할 나위 없는 메뉴였다. 토마토 치즈가 들어간 블린을 먹으며 고요한 아침을 즐긴다. 냅킨 위에 쓰인 러시아어가 궁금해져 문장을 추측한다.


“저기에 적힌 게 뭘까요? 맛있게 드세요?”
“우흐 뜨 블린.”

아, 가게 이름이었구나.





아침을 먹고 우리가 찾은 곳은 해양공원. 비둘기와 아이들이 뛰노는 분수대를 지나 바닷길에 도착했다. 날은 흐렸으나 파도 소리가 모든 것을 용서해준다. 아빠 목마를 탄 아이의 미소, 다정하게 걷는 연인의 뒷모습 또한.


언니와 나눈 대화 위로 온기가 내린다. 얇은 겉옷과 우비가 무용지물이던 어제를 위로해주는 빛에 정신이 들었다. 오후의 낮잠이, 고장 난 자물쇠가, 침대 위에 마르고 있을 장갑이 긴 여정의 작은 부분이 된다. 혼자 떠나왔지만 함께라는 사실에 감사해지는 오후.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든다.






해질 무렵, 독수리 전망대로 향했다. 어둠이 내린 도시의 빛에 취해 오후의 긴 시간을 보낸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야경을 즐기던 우리는 위기에 직면한다. 9시간이나 위를 비워 둔 채 걸어 다녔던 것. 뭘 먹을지 고민하다 클레버 하우스-블라디보스톡 마트-로 향한다. 굶주린 여행자들은 쇼핑을 시작한다. 라면과 햇반, 김치, 보드카, 게살.


준비 시간이 길어져 라면은 죽이 됐지만 흙을 먹어도 맛있다고 느꼈을 늦은 저녁. 로비에 모인 다섯 명의 여행자들은 각자의 삶을 나누며 건배했다. 언니들은 모스크바에 간다는 나를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하루도 별 탈 없이 흘렀으니.


아직은 괜찮다고 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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