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한 줄에 가슴이 뛴다-
조병화(1921~2003)
여보, 라일락꽃이 한창이요
이 향기 혼자 맡고 있노라니
왈칵, 당신이 그리워지오
당신은 늘 그렇게 멀리 있소
그리워한들 당신이 알 리 없겠지만
그리운 사람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오
어차피 인생은 서로서로 떨어져 있는 거
떨어져 있게 마련
그리움 또한 그러한 것이려니
오, 그리운 사람은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런가
이 짧은 한 줄이 내 가슴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시인의 한 문장 속에 함축된 그리움과 향기가 나를 단숨에 삼키는 듯했다.
시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라일락꽃자리에 다른 꽃을 살짝 얹어보았다.
“여보, 지금 이곳은
“여보, 지금 이곳은
“여보, 지금 이곳은
... 민들레꽃으로, 수선화꽃으로, 장미꽃으로....
꽃은 꽃인데, 이상하게 맛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라일락의 다른 이름, ‘수수꽃다리’를 불러본다.
이름이 곱고 그 소리마저 부드러워 왠지 괜찮을 것 같았다.
“여보, 지금 이곳은
하지만 역시 아니다.
마치 연보랏빛 봄 드레스 위에
무거운 겨울 코트를 입힌 것 마냥 영 어색하다.
라일락이 아니면
이 자리는 왠지 비어 있는 것 같다.
그건 꽃의 색이나 향 때문만은 아니다.
그 빈자리는
단어 하나가 지닌 고유한 힘 때문일지도 모른다.
라. 일. 락.
세 글자를 천천히 불러보면,
혀끝이 또르르 말리고 입안이 향기로 가득 찬다.
단어의 울림이 향기와 색을 품어
하나의 완벽한 장면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단어가 피워내는 풍경,
그것이 시인의 힘이 아닐까.
지금 이곳은,
라일락꽃잎도 보랏빛 향기도
바람에 흩어지고,
그 자리에 한여름의 초록잎만 무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