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려도 괜찮아, 뿌리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나무에게 배웠다

by 앨리스킴


산책길, 그네 벤치에 남편과 나란히 앉아 멍 때리고 있는 그 순간이 참 좋다.

그저 한 곳에 시선이 머문 채, 오래도록 바라보다 보면,

세상이 다 내 편이 되어주는 듯 마음도 편안해진다.


그네에 앉아 발끝으로 깔짝깔짝 땅을 밀면, 풍경도 덩달아 흔들린다.

풀잎 끝에 조롱조롱 매달린 이슬방울들이 아침 햇살을 머금고는,

곧 사라질 듯 반짝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저 멀리 펼쳐진 아침 풍경은, 마치 한 칸씩 넘어가는 뷰마스터처럼 새롭고도 낯설다.


파란 하늘 아래 층층이 겹쳐진 구름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며,

강아지가 되었다가 고양이가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하트 모양을 만들어 우리 쪽으로 훅 날려 보낸다.


이름 모를 새들은 구름을 지붕 삼아,

높게, 낮게 날갯짓하며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날아간다.


가는 건지 오는 건지 방향을 알 수 없는 비행기는

파란 하늘에 하얀 분필로 그은 듯 두 줄을 남기고,

새보다 훨씬 빨리 시야에서 사라진다.


두 발을 땅에 대고 그네를 멈춘다.

소리 없는 바람이 우리 곁을 스치듯 지나가며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건드리더니,

이내 전봇대보다 훨씬 키 큰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바람에 몸을 맡긴 버드나무는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바람이 멎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치 바람이 “이제는 힘 빼고 좀 쉬어도 괜찮아”라고 속삭여주는 것 같다.


그 말에 화답하듯, 나무는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애써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그저 유연하게 바람을 받아내고, 다시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억지로 버티면 부러지기 쉽다는 걸,

흔들린다고 해서 뿌리까지 뽑히는 건 아니라는 걸,

자연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버티는 게 아니라, 살아내기로 했다


“그때 계속 버텼다면 어땠을까?”


버드나무처럼 우리도 삶에 힘을 빼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바람은 생각보다 거셌고,

때로는 방향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


딸아이가 열심히 일군 카페를 우리 부부가 이어받았다.

정성을 다해 성실히 운영하면 잘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경험 없는 장사의 결과는, 어쩌면 시작부터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버틴다’는 말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흔들리지 말자. 휘둘리지 말자.

이 악물고 서 있어야 한다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번 달만 넘기면,

다음 달엔 좀 나아지겠지.

휴가철 지나면, 연휴 끝나면, 겨울이 끝나면…


하지만 그렇게 버티다 보니

어느 날 내 안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신호였다.

…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하나씩 들여다보기로 했다.

정말, 뭐가 문제였을까.


운영 방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메뉴 때문도 아니었고, 우리 마음가짐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지갑은 닫히고.... 마음들은 점점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

결국,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지금 그만두는 게 맞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우리 가족은 며칠을 밤새 회의하고, 고민했다.

보증금과 인테리어에 들어간 대출금, 원상복구 비용,

한 달이 마치 일주일처럼 돌아와 금방 손을 내미는 벅찬 월세…

현실은 냉정했고, 결단이 필요했다.


결국 우리는 가게 문을 닫기로 했다.


그 결정을 내린 날,

식탁에 앉은 우리 가족은 평소답지 않게 조용했다.

숟가락 소리만 정적을 깨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문장들이 떠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자.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잠시 맡겨두자.

흔들려도 괜찮아.

우리에겐 아직 뿌리가 있어.

그 뿌리가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할 힘이 되어 줄 거야.”


그 말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꼭 누군가 우리에게

“쉬어도 괜찮아요” 하고 정식으로 허락해 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진짜 숨을 쉴 수 있었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불안하고, 자책도 밀려왔다.


‘그때 이런 메뉴를 넣었더라면,

광고를 좀 더 해봤더라면,

계절 메뉴 하나만 더 준비했더라면…’


하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그때 과감하게 내려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더 많이 지치고 상해 있었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허깨비처럼, 껍데기만 남았을지 모른다.


요즘 산책길에 나서면,

주변 가게들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가게 안에 주인 혼자 덩그러니 앉아

부채질하며 빈 테이블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남 일 같지가 않아,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북적이던-

이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던 가게들도,

이제는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이 시대엔 아무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이제는 그 사실이 더 분명해졌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버는 것’이라는

그 역설적인 결론이,

그 당시 우리에게 유일한 답이었다는 걸

지금도 깊이 실감한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이

참 소중하고, 고맙다.


아직 대출금을 다 갚지 못한 상황인데도,

하루하루 매출에 마음 졸이며 살던 날들에서 벗어난 지금,

그 해방감이 우리를

조금 더 여유롭게,

조금 더 만족할 줄 아는 삶으로 이끌어주었다.


덜 벌면 덜 쓰고, 더 벌면 조금 더 쓰면 된다.

생각보다 단순한 삶의 리듬.

건강하게 하루를 보내는 일,

그게 지금의 우리에겐 가장 소중하다.

그런 것들이,

멈추고 나서야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아침마다 숲을 걷고,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며 틈틈이 책을 읽고,

가끔은 늦은 밤까지 영화도 보고, 늦잠을 자기도 한다.


그런 평범한 하루가,

바람에 몸을 맡긴 나무처럼

참 평화롭다.


눈앞의 버드나무는 왼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눕는다.


그저 바람이 이끄는 대로 잠시 흔들리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나무는 억지로 바람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자꾸, 우리 삶과 겹쳐진다.


우리도

애써 버티지 않는 유연함으로

하루에 몸을 실어본다.




혹시 오늘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당신이 있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그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요.


잠시 멈춘다고

무너지는 건 아니잖아요.

나무도 흔들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까요.


우리 삶도 그래요.

지금은 그저,

나무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중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