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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Jul 24. 2020

첫 사랑이 많은 여자

1986년 나는 5학년 2반 담임이 되었다.

나를 처음 본 교감선생님은 " 김선생, 파마도 하고 화장도 좀 진하게 하고 해야겠다. 다 큰 머시마들하고 섞이면 누가 선생이고 누가 학생인지 모르겠다." 라면 걱정 반 핀잔 반을 말씀하셨다.

그 당시 나는 칼단발에 마르고 작은 체구이니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파마도 하지않았고 진한 화장도 하지않고 버텼다. 난 내 스타일이 있으니 ㅋ 

34년이 지난 지금도 첫 아이들은 내가 낳은 나의 아이들처럼 애틋한 추억 속에 있다. 다만 나이가 들어 모든 아이들이 다 떠오르진 않지만 .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아이는 1번 김명O.

그 아이는 그 당시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의 헤어스타일은 엄마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나처럼 규격에 짜여진 엄마들은 단정한 머리를 고수하지만 유행에 따라 아이들의 헤어스타일은 자주 바뀌어 어느 날은 몇몇의 남자애들은 똑같은 머리를 하고 앉아 있다. 긴 시간 파마와 염색에 지쳐 학교에 오면 졸고 힘들어 하는지 엄마들은 모르나보다. 그저 이쁘기만 하면 오케이인가보다.

 김명O은 솔직히 헤어스타일이라 말할거도 없다. 그냥 빡빡이었다. 그것도 추우나 더우나 머리 한톨없이 정말  찐 빡빡머리. 요즘 아이들같으면 과연 그렇게 할 아이들이 있을 까 싶다. 가나다 순으로 1번이 되었지만 그 아이는 키도 작아 진짜 1번 같은 아이였다. 부리부리한 큰 눈은 빡빡머리 덕분에(?) 더 커보였고 까불까불한 말솜씨와 잘 웃던 그 아이 덕분에 학급의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5학년이나 되면서도 꼭 1학년처럼 선생님과 결혼하겠다고 나를 엄청 좋아하고 잘 챙겨주던 신성O,

바가지 머리에 살집이 있어 통통하고 시골아이처럼 두리뭉실하게 생겼던 그 아이는 15년 후에 내가 못알아볼만큼 키고 크고 젖살이 빠져 엄청 잘 생긴 청와대의 멋진 경찰이 되어있었다. 덕분에 내가 맡은 6학년 아이들의 현장학습을 청와대로 갈 수 있었고 거기서 재회한 그 아이는 어느새 나의 보디가드처럼 날 장 챙겨주어 그 당시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왜 우리 선생님과 손을 잡냐며 질투 아닌 질투를 하기도 했다. 

엄청 똘똘했던 천주O.

일자 앞머리에 또랑또랑하여 어려운 가정형펀에도 캔디처럼 활발하고 5학년 여학생이, 선생인 나보다 야무져서 의지가 되던 아이, 나중에 커서 뭔가 한 자리 할 것 같은 아이였다. 쌩신규였지만 나의 눈은 틀리지않아 그 아이는 혼자 힘으로 공부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거기서 멋지고 똘똘하게 살아가고 있다. 

엄마의 치마바람으로 안타까웠던 김병O.

말도 잘하고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해서 전교회장까지 했지만 엄마의 과한 교육열이 아이 스스로 일어서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때때마다 엄마의 힘이 미치더니 그 똘똘하던 아이가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떨어져 후기 고등학교에 들어갔단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40대 중반인 그 아이가 스스로 잘 자라 어엿한 중년이 되어있기를 기도한다. 

나의 수호전사였던 이광O.

우리 반 반장이었던 아이, 키도 작고 마른 체구였지만 축구도 잘하고 마음씨도 착하여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 1,2학기 내내 반장이었던 아이였다.(지금은 1학기 반장은 2학기에 할 수 없는 학교가 많음). 쎙신규라 환경정리 조차 힘들어 하는 나에게 같은 초등교사였던 엄마에게 부탁하여 어느 날은 멋진 타이틀을 만들어 와서 나를 감동시켰던 아이, 도시락을 먹을 때면 맛있는 반찬 한 개라도 내 도시락에 얹어 주던 따뜻한 아이였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거나 나를 힘들게 하면 본인이 더 화를 내며 아이들을 통솔하던 기특한 아이였다. 아마 따뜻한 아빠, 따뜻한 남편이 되어 있을 듯하다. 

나처럼 선생이 된 장윤O, 황O

유난히 수학을 못해 나를 힘들게 했지만 그야말로 백치미가 이뻤던 김현O

자기 아빠차가 콩코드라고 자랑하던 김진O

학교 앞 분식집 아들 김보O

의리의 사나이 최재O

6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경주수학여행에 옛선생을 찾아 먼길까지 와준 고마운 김태O 

1986년의 5학년 2반은 거의 60명이었는데 내 기억력의 한계는 너무나 초라하며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그 때의 첫사랑의 마음은 아직도 여전하다고 변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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