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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01. 2021

눈사람의 실존주의-4

[126일차]



눈사람을 구성하는 것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나는 여전히(그리고 분명히) 그가 하고 있을 어떤 인사의 형태를 상상했다.


그것은 메르하바, 라고 뜨거운 숨과 함께 허공으로 뱉는 하얀 입김의 그 형태와는 전혀 다를 것이었지만, 그 인사가 어떤 식으로, 어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알기 어려웠다.


나는 라디오의 채널을 맞춰보는 것처럼 그가 하고 있을 인사의 채널을 맞추기 위해 상상을 여기저기로 풀어보았지만, 딱히 닿는 곳이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눈사람은 여전히 플라스틱 패트뚜껑이 붙어 있는 어리숙한 얼굴이었고, 그는 여전히 메르하바, 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인사를 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냥 그것일지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그저 접속할 수 없는 동떨어진 어떤 채널에서.



그리고 어느 밤이 지났다.



나는 눈사람의 최근 사진을 i에게 보내줬다. i는 말했다.


눈사람이라고?


눈도, 사람도 아니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렇다, 라고 말하자 i  지겨워하는 목소리로, 하지만 무슨 말인지   같다는  답했다.


사람들이 치웠지?


i도 언젠가 나눴던 그 대화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눈사람은 녹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치워지지도 않는다고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눈사람을 조금씩 허물어갔다. 누군가는 가볍게 손가락으로 긁어서. 누군가는 해맑은 주먹이나 발길질로. 누군가는 무기력한 삽으로.


조금씩 변하는 눈사람 앞에서, 나는 그것을 눈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기에 적절한 타이밍을 놓쳤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래그래. i 대답했다. 그렇게 말할  있는 날도 있지. 나는 그렇구나, 했다.


우리는 근황을 조금씩 나누고, 인사를 했다. 돌아오면 말해. 그리고 휴대폰 너머로 사라진 i의 모습은, 눈사람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다시 한번 사진을 보며,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상상해내야 하는 존재들을 생각했다. 마치 i처럼. 이어지는 거짓말들 위에서야 겨우 위태위태하게 존재하는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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