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수아이 Apr 09. 2021

데일리 콜라주

[128~135일차]


비슷한 일상이 하루하루 흘러간다.


흘러가는 일상을 어떻게 기록할까.


나는 윈치수 알바생이고, 내가 하는 일에 맞춰 일기를 쓰면 이런 식이 될 거다.


1번 줄을 날렸다. 2번 줄을 날렸다. 날씨 때문에 휴식. 3번 줄을 날렸다..


업무로 일상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직업으로 사람을 말하는 것도. 거기에는 그럴싸한 논리가 있고, 알기 쉬운 흐름이 있다.


그러나 실제 하루하루의 인상은 그런 식으로 남지 않는다. 어느날 내가 '아 그날은 13번 스트랜드를 날린 날이었지. 그날은 장력 때문에 고생을 좀 했지'라고 어떤 하루를 추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척 쉽지만 지루한 일이다.


그런 쉬운 문맥을 힘겹게 벗어나면, 거기에는 진짜 일상의 인상들이 있다. 내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눈은 어디에서 멈췄는지,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이 진짜로 무엇이었는지.


문맥을 벗어난 나의 하루하루의 기록은 이렇다.


어떤 날은 빵이 둥글었다. 유난히.


한국 식사가 별로여서 터키 식당에 갔었고 거기서 나는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보통 제공되는 이 기본 빵은 이리저리 치여서 가죽이 구겨지기 마련이다) 온전한 상태의 빵을 만났다. 물론 모양만큼이나 신선했다. 고소한 빵냄새와 탄력을 잃지 않은 쫄깃한 식감.


이런 빵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수많은 빵들이 쌓여있는 더미 사이에서도 여전히 초심을 간직한 드문 빵.


키 큰 메멧이 졸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 넣기를 좋아하는 메멧은 잘 때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잔다. 살금살금 다가가 깨워서 졸았지? 라고 물어보면 시익 웃으면서 안 졸았단다. 방금 깨운 게 나인데도.


사멧이 자기 농장에서 수확한 벌꿀을 가져왔다.


벌집이란 것은 생긴 것만큼 맛있지는 않다. 아무리 씹어도 입 안에 남아서 먹어도 되는 건가 고민하게 만든다. 결국 밀랍은 뱉어버리는 걸로.


꿀은 맛있었지만 많이 먹지 못하고 남겼고, 하얗게 굳어져버렸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의 무게만큼 오랫동안 컨트롤룸 한구석에 남아 있다가 어느 비오는 날 버려졌다. 미안해 사멧.


아침이 되어 퇴근하는 길에 무척 맛있는 냄새가 나 따라갔더니 터키 배식소에서 닭 바베큐를 하고 있었다.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어서 식당에 들어가 얻어먹었다.


거친 불맛이 기분 좋게 남아 있었다. 터키에서 먹었던 모든 닭고기 중에서 가장 맛있었는데, 어째서 밖에서 파는 것들은 이 맛을 내지 못하는 걸까.


내 방에 들어온 적이 있었던 까만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


호텔 로비로 통하는 문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항상 애교를 부리던 살가운 녀석이었다. 덕분에 인기도 많아서, 1층 창고에 생긴 산모실에는 온갖 사람들이 갖다 바친 음식과 물 등의 조공들이 가득했다.


고양이라기보다 아직 쥐에 가까운 새끼들은 아직 귀엽다기보단 안쓰럽다는 느낌이 강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호텔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겠지만, 아쉽게도 그 모습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젠 당당하게 정문을 걸어 나갈 수 있다

드디어, 마침내, 공사장 현장 봉쇄(카란티나)가 풀려서 격리 호텔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


거의 2개월이 넘도록 갇혀 지내던 생활이 끝나고, 이제 우리는 다시 자유를 되찾아 휴일이면(휴일이 있다면) 바깥 마을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넓고 쾌적했지만 자유가 없었던 케라틴 호텔을 떠나, 마침내 우리는 마음의 고향 랍세키의 일디즈 호텔로 돌아왔다.


비록 초라하고 낡은 숙소지만 자유가 있다면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라고는 했지만 방 배정 운이 없어서 예전 방보다 훨씬 못한 방을 받아버렸다.


하나 달린 창문 밖의 풍경은 이렇다. 바로 붙은 벽. 건물 내 갑갑한 공기가 가득한 막힌 공간. 그마저도 방충망이 없어 열어두면 어떤 생물이 덜컥 들어올지 모른다.


자유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도 잠시, 앞으로 이 방에서 환기도 못하고 갑갑하게 살아가야 할 생각을 하니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어두운 표정으로 짐을 풀고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눕는다.


그래, 나는 어떤 소설 속 주인공이다. 나는 스스로 최면을 걸듯 생각한다. 그 주인공은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뛰쳐나와 도시의 아주 낡은 호텔에 자리를 잡는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음울한 숙소. 삐걱거리는 판자 계단. 무뚝뚝한 호텔 주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런 곳. 나는 그런 소설 속에 와 있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정말로 이 상황이 소설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자기최면을 걸며 잠을 청한다. 


햇빛을 듬뿍 받으며 자유로운 발걸음을 내딛을 어느 휴일을 꿈꾸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눈사람의 실존주의-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