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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Apr 11. 2021

드디어 밖으로

[136~147일차]

공사장 봉쇄가 2개월만에 해제되었지만 일상은 여전히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


현장 숙소를 이용하는 터키 친구들은 아마도 외출 시간 제한이 있는 것 같다. 교통편도 그렇고, 봉쇄가 풀리더라도 밖으로 나가기가 수월치는 않은 듯.


봉쇄 때문에 갑갑하다던 한국인들도 막상 봉쇄가 풀리자 의외로 밖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없다. 다들 숙소에서 그냥 쉬는 걸 선호한다.


그래 나만 신났지.


그렇다고는 해도 휴일은 없고 맨날 야근을 해서 당장은 이런 풍경 밖에 보질 못한다. 식당은 이미 끝났고 마트도 일찍 문을 닫는다.


그래도 시원한 밤공기를 쐬며 마을 거리를 다녀본다. 자유의 향기가 이렇게 달콤했던가.


잠깐 바람을 쐬고 난 뒤, 기약없이 휴일을 기다리며 일을 한다. 진짜 바람이 불지 않고 있기에 휴일도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 터키 친구들이 작업공간에 작은 오두막을 만들었다. 허허벌판에다가 차이(터키식 홍차)를 끓여 먹기 위한 작은 테이블을 가져다 놓는 것부터 시작하더니 전기포트, 설탕, 종이컵, 그리고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수포, 앉아서 먹을 탁자와 의자, 그리고 그 위를 덮을 더 큰 방수포..


이런 식으로 점점 커지더니 6사람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아늑한 오두막으로 발전해버렸다.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찻집


국기를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터키 국기를 하나 그려줬다


비가 오는 날 바깥 작업을 하다가 비를 피해 이곳에서 잠시 차이타임을 가지며 안 되는 언어로 수다를 떨면, 그것만큼 아늑한 기분이 드는 순간은 없다. 한 번도 내 손으로 끓여본 적이 없는 차이.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오두막에 놀러논 손님에게 항상 차이를 배가 터지도록 권한다.


항상 친근한 터키 친구들에게 무엇으로 보답을 해줄 수 있을까 하다가, 그들의 헬멧을 튜닝해주기로 했다. 현장에 굴러다니던 마카와 과거 초등학교 시절 포스터를 만들던 실력을 발휘해, 성의 없게 쓰였던 그들의 이름을 좀 더 그럴싸하게 바꿔줬다.


가나가와 바닷가의 높은 파도


휴먼포스터칼라체(꺼진불도 다시보자)


우리 드라이브 윈치 팀 식구들에게만 해주려고 했더니 어느새 입소문을 타서 사멧의 절친(이라고 해도 나이 차이는 열 살 이상) 네조가 컨트롤룸까지 헬멧을 들고 찾아왔다. 원래 있던 낙서들을 노란 스프레이로 깨끗하게 덮어버리고 온 정성을 생각해서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름이 NECO(네코)라 어울리지 않게 무척 귀여운 이름이구나 했는데 터키어로는 '네조'라고 읽는단다. 아쉽.


이후로 네조가 또 연달아 두 명의 친구들을 데려왔는데, 이 이상 가지를 치면 앵커리지의 100명 인부들이 죄다 헬멧을 들고올 것 같아서 그 두 친구까지만 하는 걸로 합의를 했다.


그래도 미안했는지 찾으러 올때 이것저것 구겨진 조공품 과자와 커피들을 가져오더라.


그러던 와중에 휴일은 아니고, 주야간 교대를 하면서 빈 반나절의 시간을 이용해 친구인 JB와 겔리볼루에 나들이할 기회가 있었다. 원래는 야간조 적응을 위해 잠들어야 했을 시간. 그러나 이 짧은 자유의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 꿀꿀한 날씨라도 강행군을 펼쳐 배에 몸을 싣는다.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JB의 손을 억지로 끌고 배를 타고 간 겔리볼루는 그러나 휴업 상태.. 문득 생각해보니 코로나로 인한 터키 외출 금지 요일인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망했군.


물론 외출금지라고 해서 정말로 사람들이 안 다니지는 않는다. 그나마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가 바클라바와 차이를 먹는다. 투덜거리는 JB. 배 타고 건너와 빈 손으로 갈 순 없어서, JB는 마트에서 발포 비타민을 사 간다.


돌아갈 때 쯤에 잠깐 보이는 햇빛. 그래 겔리볼루는 햇빛으로 반짝여야 멋진 동네지. 마음이 조금은 풀린다.


JB와 저녁을 먹기 위해 들린 깔끔한 되네르 케밥 체인점 베레켓 되네르. 드디어 오랜만에 마을에서 케밥다운 케밥을 먹게 되었다.


한국인의 입맛엔 역시 이스켄데르


뒤림 케밥을 김밥처럼 썰어 놓은 듯한.. 베이티? 케밥

사람 대신 기계가 적정량의 고기를 잘라 내는 첨단 시설의 체인점인 이곳은 너무 '체인점' 느낌이라 그동안 지나치며 쉽게 발걸음이 가질 않았다.


그런데 웬걸, 맛을 보자마자 알았다. 여기가 시골마을 랍세키의 원탑 맛집이로구나. 토마토 소스의 맛도, 터키 특유의 육향이 알맞게 나는 고기도, 살짝 그을리듯 구워 석쇠 모양이 찍혀 있는 베이티 케밥의 빵도, 입에 착 감기는 좋은 맛이다.


생각해보면 흔해빠진데다 일률적인 맛의 체인점이라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처음 접하는 외국인에게는 그만큼 정제된 맛을 보장해주는, 실패 없는 맛집이 아닌가. 놀부 부대찌개나 심지어 김밥천국도, 한국을 처음 찾는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독특한 로컬 맛집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어쨌든 이런 좋은 곳을 나만 알 수 없어서 알바생들에게 공유해본다. 추천을 받고 이후에 여기에 와서 먹어 본 Y의 표현으로는 랍세키의 한줄기 빛. 이렇다할 맛집이 별로 없는(아니 식당 자체가 몇 개 없는) 랍세키에서 정말 구원 같은 곳이다.



뭐, 이후로도 휴일은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 거의 한달 째 휴일을 갖지 못하고 있다. 휴일근무비를 따로 준다고는 하는데, 봉쇄가 해제된 지금에는 차라리 돈을 주고서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래도 야간조로 교대하게 되어 다행인 점은 오히려 야간조가 출퇴근 전후로 마을에서 식당을 찾을 시간대가 나온다는 것. 오후 7시에 출근 차를 타기 전에 저녁을 밖에서 먹고, 오전 8시에 퇴근하고 숙소에 도착하면 여기저기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가게와 마트들이 문을 열고 있다.


그래, 현장 봉쇄가 풀린 것만 해도 어딘가. 이렇게 바깥 음식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동할 지경이다. 조금만 참으면 곧 나갈 일이 생기겠지, 라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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